1989년 기괴하고도 익살스런 세계관으로 코믹스의 질감을 보여줬던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 배트맨 시리즈는 감독에 따라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왔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에 더 다가선 모습을 보여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은 배트맨의 어두운 내면에 주목했다. 잭 스나이더를 수장으로 한 DCU는 원작과 가장 흡사한 싱크로율의 ‘배트맨’인 벤 애플렉을 선보이며 캐릭터에 있어 호평을 자아냈다.
슈퍼맨과 함께 DCU 히어로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은 솔로무비를 준비하던 중 벤 애플렉이 하차를 하며 난항을 겪었다. 이후 맷 리브스 감독이 메가폰을 쥐고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으로 캐스팅이 되면서 재단장을 했다. <더 배트맨>은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은 모 아니면 도라는 걸 잘 보여준다. 기존 히어로물과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주며 새로운 배트맨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더 배트맨>은 장르적으로 보면 히어로물보다는 하드보일드 추리극에 가깝다. 고담시를 배경으로 배트맨이 수수께끼의 연쇄살인마 리들러를 잡는 이야기의 구성을 취한다. 언급되는 작품 역시 이전 ‘배트맨’ 시리즈나 히어로물이 아닌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이나 <조디악>이다. 메인 빌런인 리들러의 캐릭터는 조디악 킬러에서 가져왔으며 범인이 남긴 힌트로 사건을 추적하는 방식은 <세븐>을 연상시킨다.
리들러의 캐릭터는 지능형 확신범으로 배트맨의 머리 위에서 자신의 설계에 따라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특별한 힘을 지닌 빌런을 등장시키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보편적인 악이다. 고담이라는 도시가 망가진 이유는 특정한 세력 때문이 아닌 이 도시 때문에 망가지고 무너진 사람들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DCU의 외전격이라 할 수 있는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와 연결되는 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추리극의 구성에 분위기는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질감을 선보인다. 히어로물의 과장된 액션 대신 육탄전이 주를 이루며 거친 느낌을 준다. 이를 위해 배트맨의 캐릭터는 히어로가 되고 2년이 지난 시점을 택한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고담의 악을 처단하는 그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경감 고든을 제외한 경찰들은 배트맨을 자경단으로 취급하며 시민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배트맨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캐릭터는 고독과 외로움을 짊어진 하드보일드 느와르 장르의 형사 캐릭터와 유사하다. 리들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캣우먼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나 사건이 배트맨의 과거와 연결된다는 점 역시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구성을 연상시키며 히어로물과의 자연스런 결합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 캐릭터가 지닌 어둠을 빌런과의 연결로 극대화시켰다면 맷 리브스는 장르적인 변형을 통해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배트맨이 지닌 어둠과 고뇌는 하드보일드 수사극과 연결되었을 때 더 극대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는 점과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다는 점,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란 양지와 음지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DCU의 히어로 중 대표라 할 수 있는 배트맨만이 지닌 캐릭터성을 바탕으로 DC코믹스 특유의 무게감을 더 강하게 장르에 투영시킨다.
로버트 패틴슨은 자신만의 배트맨을 창조해내며 자신을 향한 우려와 부담을 이겨냈다. 빌런보다 배트맨이 더 돋보여야 하는 전개 속에서 하드보일드 탐정과 어둠이란 심연에 빠진 히어로의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담아낸다. 외형적인 변화는 물론 이후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변화를 그려내는데 성공한다. 이전 제임스 본드와는 다른 007을 선보이며 호평을 자아낸 다니엘 크레이그를 떠올리게 만든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히어로물로 넘어왔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더 배트맨>의 선택은 모험이라 볼 수 있다. 관객들이 기대하는 블록버스터의 묘미 대신 장르적 저변의 확대로 신선함을 준다. <조커>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더 배트맨>의 시도에 열광할 것이다. 관건은 이 시리즈가 다음 작품에서도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여부이다. 그만큼 <더 배트맨>은 긍정적인 의미로의 논쟁을 일으킬 영화이며 앞으로 등장할 히어로 무비는 이 영화의 아성과 맞부딪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