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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인터뷰] ‘박재범 감독’ 한 땀 한 땀 손수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장인의 부활



추운 겨울, 추위로 힐링하는 이냉치냉해보는 건 어떨까? 따뜻한 스크린 너머로 매서운 시베리아 툰드라를 경험할 수 있다. 거기에 끝없는 설원을 배경으로 따뜻한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동화 속 세계.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대자연의 눈부시도록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여행이 등장했다.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의 언론시사회가 있던 날 박재범 감독을 만났다. 척박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8년간 애정으로 지켜온 진심이 전해졌다. 직접 영화 속 인형을 테이블에 늘어 트려 놓는 모습이 꼭 자식 자랑에 한창인 부모 같았다. 직접 만져보니, 생각보다 무거웠고, 정교해서 놀랐다. 한 땀 한 땀 수놓는 기분으로 정교하게 움직였을 모습이 선연했다. 작고 느리지만 뚝심있게 걸어가는 장인 손길이 느껴졌다.

아주 오랜만에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출현이라 반갑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것 자체가 신()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보다 인형이나 캐릭터를 직접 그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조물주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할 것 같다.

“작업하다 보면 엉뚱한 상상도 든다. 인형을 하나씩 움직이듯이 신이 인간을 관찰하고 설계하는 건 아닐까. 때로는 인형이 혼자서 움직여 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웃음) 물론 감독 혼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팁 화합이 중요하다. 혼자만의 생각에서 여러 사람의 생각과 합쳐지고 시너지가 생겨 한목소리로 일치되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 어느 정도 친해지고 합이 맞을 때가 있다. 그때 가장 중요한 장면을 찍는데 그게 영화의 마지막 신이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 3년 동안 작업했다고 들었다. 지치고 힘든 시간이 있었을 텐데 꾸준히 만들고 있는 이유와 매력이 있을 것 같다.

“3D 애니메이션도 해봤는데 재미있기는 했지만 동시에 허무함도 들더라. 그래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하게 되었는데 나한테 잘 맞았다. ‘불완전한 것’에서 오는 매력과 ‘기존 물성의 깨짐’인 것 같다. 부러지기도 하고 먼지도 보이는 완벽하지 않아서 친근함이 생긴다. 거기에 미술적인 감각이 덧씌워지면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 예를 들면 종이나 천이 불이나 오로라가 되는 거다. 전혀 다른 쓰임새가 마법처럼 보이길 원했다. 인형인데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스톱모션만의 찐매력이지 싶다.”

아날로그 인간에 가까운 것 같다. 작업 외 시간에 LP만 듣고 커피는 직접 그라인더에 갈아서 내려 마시고 그러는 건 아닌가? (웃음)

“나는 생각해 보면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인 것 같다.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행위가 좋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선호한다. 그렇다고 모든 IT 기기를 끊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웃음)”

영화는 죽음생명이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춘기 그리샤는 아픈 엄마의 죽음을 막고 싶어 위험한 모험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숲의 주인은 생명 연장의 열매를 주기도 한다. 평소 죽음과 생명에 관한 생각도 궁금하다.

“죽음에 대해 떠올린 건 5살 때부터다. 어머니가 크게 아프셨는데 나를 지켜줄 단 한 사람의 떠나감이 무서웠다. 영원하지 않을 것들, 사라지는 존재의 두려움이 반영된 것 같다.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대학생 때 SBS 다큐 [최후의 툰드라]를 보고 충격 받았다. 그냥 강렬했다. 수천 마리의 순록 떼를 몰고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피우는 사람들, 자연에 동화된 사람들, 욕심 없이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 감동적이었다. 어머니로 인해 ‘죽음’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생명’을 느꼈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기회가 생겨 작업하게 이번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전작 단편 <더미>를 인상적으로 봤다. <더미>는 차 안이란 갇힌 공간이었고, <빅 피쉬>는 바다, <스네일 맨>은 사막,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은 방 안이 배경이다. 낯선 땅 툰드라라는 설원을 배경으로 한 이유가 있을까?

“전작 <스네일 맨>에서 사막을 해봐서 이번엔 반대로 해보고 싶었다. 사실은 실제 툰드라 다큐팀과 연락이 닿아 함께 떠날 예정이지만 아쉽게도 코로나로 무산되었다. 근데 오히려 잘 된 것 같다. 직접 보고 오지 않았기에 상상력에 보탬이 되었다고 할까. 물론 툰드라 다큐멘터리를 레퍼런스 삼았지만 일부러 똑같이 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 표현하면 어쩌지란 두려움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데 다 똑같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이런 강박증과 내가 느낀 설화의 세계를 그대로 끌어 들여와 나만의 툰드라를 설계했다.”

, 오로라, , 눈 등 자연을 어떻게 표현했나. 하나의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신기하다.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눈 하나만 보더라도 천, 설탕, 스티로폼 등 재료에 따라 질감이 달라진다. 이끼, 바람, 오로라도 마찬가지다. 오로라는 부산의 진시장(혼수, 이불 전문 시장)에서 구매한 비단을 활용하기도 했다. 다큐에서 본, 막막하지만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것에 영감을 얻었다. 지평선의 무한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외국에서 쓴 방법을 연구하다가 실제 개발한 방법도 있다. 캐릭터의 얼굴도 표정을 갈아 끼우는 경계선을 일부러 지우지 않았다. 원래는 CG로 작업해서 부드럽게 보여준다.”

그리샤는 선택받은 소녀이자 사춘기다. 불길한 전조 현상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어미 사슴의 죽음, 그리샤의 코피 등이 등장한다. 사슴의 피를 마시는 장면도 있고 피가 흐르는 장면도 있다. 붉은 곰, 붉은 열매 등 붉은색이 상징적으로 쓰였다.

“툰드라를 떠올렸을 때 끝없는 하얀 땅의 선명한 피가 떠올랐다. 영화 속 ‘피’는 여러 의미로 쓰였는데 먼저 끊기 어려운 혈연관계를 상징한다. 엄마와 딸(가족)의 이야기, 희생할 수 있는 마음, 생명과 직결되기도 한다. 같은 피지만 어느 순간에 어떻게 흘리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했다. 그리샤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곰)를 만났을 때 활활 타오르는 거다. 붉은 열매 또한 둘이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했다.”

숲의 주인인 그분(?)은 전설로만 떠돌다가 그리샤와 마침내 조우한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 때문인지 낯설지 않았다. 이국적인 툰드라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들더라. ‘설화 모티브는 의도한 건가?

“예이츠 부족은 여러 부족을 섞은 허구지만, 실존하는 네네츠 부족을 가장 많이 참고했다. 툰드라에도 수많은 부족이 있고 서로 문화, 주거 형태, 믿는 존재가 다르다. 그중 곰을 신성시하는 부족을 포인트 잡았다. 곰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믿음의 형태를 캐릭터화한 거다. 살기 위서 먹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몹시 두려워한다는 점을 골랐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와도 비슷했고, 원초적인 생각과 믿음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놀랐다.”

성우 캐스팅도 궁금하다. 유명 성우부터 이용녀, 강길우, 김예은 등 배우 라인이 돋보인다. 특히 이용녀 배우는 12역을 소화했다. 샤먼과 숲의 주인이 잘 어울렸다.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에 할 말이 많다. (웃음) 자연스러운 연기와 목소리 톤을 원했기 때문에 전문 성우보다 작품과 어울리는 배우를 중심으로 했다. 어떤 틀이 생기지 않길 원했다. 그랬더니 녹음할 때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대본과 조금씩 바꾸더라. 그게 오히려 좋아서 입모양이 달라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갔다.”

“가장 먼저 공들인 목소리는 ‘톡챠(아빠)’의 강길우 배우였다. 단편 <명태>를 보고 반해서 다음에 목소리 출연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었는데 응해주었다. 목소리에도 디테일함이 살아 있어서 충격이 들 정도였다. 이후 강길우 배우의 추천으로 ‘바자크’에 송철호 배우를 캐스팅했다. 송철호 배우는 연극에서 잔뼈 굵은 배우다. ‘슈라(엄마)’에는 김예은 배우가 맡았다. 신기하게도 <브로커>에서 강길우, 김예은 배우가 부부로 나왔는데 우리 영화에도 그렇게 되었다. (웃음) 이용녀 배우는 실제 유기견을 돌보고 계시기에 동물과 잘 어울렸다. 숲의 주인과 샤먼 두 캐릭터를 맡기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리샤목소리는 미술 감독이라고 들었다. 촬영, 목소리 연기, 미술까지 13역을 한 건가?

“이윤지 애니메이터의 꿈이 성우였고, 원래 가이드 녹음을 했었다. 그리샤의 목소리를 찾아 성우, 아역 배우 등 많이 만났지만 딱 맞는 분을 못 찾겠더라. 이 친구가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장점을 그대로 살렸려서 그대로 진행했다.”

주제가 딱 하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연 지배, 환경 파괴, 소녀의 성장, 탄생과 죽음 등 관객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

“딱히 주제를 정해두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관객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낄 것 같다. 다만 대자연 속에서 컨트롤하려는 인물, 순응해서 살려는 인물의 충돌을 다루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긴다. 가치관의 충돌과 믿음의 형태가 잘 드러났으면 했다. 크게는 순수한 그리샤의 믿음과 모험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처음에 막막했던 마음이 결국 완성되었다는 후련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일거다. 끝은 내자고 다짐했었기에 애착도 크고 감회가 남다르다.”

영화의 중심 캐릭터를 엄마와 딸, 여성 서사로 택했다. 그리샤는 소녀에서 점차 예이츠 부족의 여성이 되어간다.

“의도한 건 아니다. ‘엄마의 땅’이라고 했을 때. 엄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전설만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용감한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인 사춘기 소녀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변화를 갖는 시기라 어울리겠다 싶었다. 딸은 엄마를 보면서 미래를 스포당하지 않나(웃음)? 영화 속에도 엄마의 기억이나 문화가 딸에게 전승되도록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앞으로 좋아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가 항상 고민이다.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여러 가지 감수하고 감내해야 하는 게 분명히 있다. 영화는 혼자 할 수 없는 공동 작업이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과 호흡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인형 각자의 영혼을 불어 넣어 준다는 일념으로 만들었다. 최대한 몰개성은 지향하고 캐릭터 간의 특이점을 살리려고 했ㄴ다.”

마지막 질문이다. 키노라이츠 회원에게 인생영화를 소개해 준다면.

“최근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재미있게 봤고 개인적으로는 <토이스토리>1이 원픽이며 버즈를 좋아한다. 감독님은 영화 만드는 방식이 좋아 봉준호 감독님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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