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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 어른이 만든 시스템 속 숫자로 환산된 청춘

정주리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고 5분 만에 수락했다는 배두나. 좋은 시나리오가 본인에게 먼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며, 수락하지 않으면 이 작은 영화가 엎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걱정했다.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배두나의 선구안이다. 영화 속 형사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시사 프로그램의 PD를 재해석한 인물이다. 사건을 따라가기 바쁜 PD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앞모습이 보고 싶었다는 배두나는 부당하고 참담한 사건의 안내자를 자처한다.

7년 전 <도희야> 때부터 호흡을 맞춘 정주리 감독과 두 번째 작업이다. <도희야>는 가정 폭력에 노출된 소녀와 사회적 낙인이 찍힌 경찰이 만나는 이야기다. 시스터후드가 느껴지는 묵직한 울림이 있는 영화다. 두 사람은 <도희야>를 통해 절친한 사이로 발전했고 깊은 끈끈한 동지애를 느꼈다고 말했다.

배우와 감독이 꼭 하고 싶었던 말

한국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출연인가. <도희야> 때 보다 한층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 몰입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고발이다. 6년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콜센터 여고생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정주리 감독은 너무 늦게 알게 된 사건을 반성하며, 지금이라도 꼭 해야 하는 이야기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책임을 통감했다고 했다.

사실에 입각해 최대한 현실적으로 만들었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며 서서히 차오른다. 시스템에 희생된 소녀, 숫자로 환산되어버린 청춘을 직시하는 영화다. 주인공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이 영화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우뚝 섰다. 제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유수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았다.

독특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전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여성이 이야기를 쭉 끌고 나가다 갑자기 사라지면, 두 번째 여성이 사건을 되짚으면서 뒤에서 밀어 올려준다. 초반, 관객이 감정을 쭉 따라가지 못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18살 소희의 마음에 몰입된 이상 무조건 끌려갈 수밖에 없다. 고구마를 여러 개 먹은 답답한 마음이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고, 먹먹하며, 흥분으로 참지 못할 심장이 멋대로 나댈지도 모른다. 12년 전 <도가니>를 봤을 때 무거웠던 마음이 되살아났다.

사무직에 취직했다고 좋아했었는데..

18살 소희(김시은)는 졸업 전 콜센터에 수습사원으로 채용되어 들떠 있었다. 하청의 하청으로 보이지만 담임은 엄연한 본사 직영점이라며 어떻게든 견디라고 책임감을 부여한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줄 알았던 소희는 낯선 일이 서툴렀지만 열심히 노력해 금방 적응한다. 고객의 언어폭력을 어떻게든 견디며 월급이란 작은 희망에 매달려 버티고 있다.

하지만 초과 근무와 야근은 일상인데 인센티브는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 힘들어 그만두고 싶어도 노력한 보상과 학교의 압박에 그러지도 못했다. 어차피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받아 언제든지 대체 인력이 가능한 대기업 하청의 콜센터는 불합리한 목표치를 세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며 호도했다. 아무리 할당량을 채워도 월 200조차 받을 수 없는 설정값이 정해져 있었던 계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씨 좋았던 팀장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날 이후 소희는 180도 달라진다. 어딘가 확연히 달라진 소희는 동료를 무시한 채 혼자만 폭주하는 이기심을 보인다.

이후 등장하는 유진(배두나)은 오랜만에 복직한 사무직 경찰이다. 지방 발령받은 기간 동안 작은 사건만 해결하면 되었다. 하지만 소희의 사건을 접한 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일개 형사가 들쑤시고 다닌다고 해서 해결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유진은 상사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깊게 파고 들어간다. 실체에 접근해 보니 업체, 학교, 노동청, 교육청, 교육부까지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에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다음 소희는.. 당신일 수 있다!

제때 수사했다면, 은폐하려 들지 않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부패는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넘어지는 도미노 같다. 쓰러지긴 했지만 밀지는 않았다는 무책임한 태도가 이어진다. 계속해서 다음 소희만 양산할 뿐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소희는 춤을 좋아했고, 호불호를 명확하게 말할 줄 아는 당찬 아이였다. 욱하는 성격이라 쉽게 흥분하긴 했으나 친구들과 잘 지냈고 회사에서 피해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콜센터를 다닌 이후 고립되고 압박받는 순간이 많아지며 변했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상담하던 모습에서 충격적인 사건 이후 넋 나간 사람처럼 일에만 매달렸다. 로봇처럼 정해진 매뉴얼에 맞춰 응대했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일상의 무감각한 모습이 계속되었다.

영화는 허구의 인물 ‘유진’을 경찰로 설정해 소희가 가장 먼저 만나 사건을 파헤칠 수 있도록 했다. 형사로 설정했지만 꾸준히 관심을 놓지 않고 취재해온 여러 기자를 섞어 창조한 인물이다. 데뷔 후, 배두나는 5번째 형사 역할을 맡아 농익은 연기를 펼친다. 잊힌 사건을 들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려 했던 감독의 뚝심을 전하는데 더할 나위 없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소희가 유진과 관객을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숫자로 환산된 청춘을 만들어버린,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안타깝다. 수명이 다하면 버려지고 새로 갈아 끼우면 그만인 건전지가 되어버린 인력. 어쩌면 ‘다음 소희’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슬프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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