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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 유관순 이야기] 이 영화는 왜, 흑백으로 연출되었을까?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가 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유관순 열사의 옥중에서의 고민과 고통을 통해, 영웅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 이 영화에 많은 관객이 응답했다. <항거>는 신화처럼 멀리서 빛나고 박제되어 있던 유관순 열사가 우리처럼 숨 쉬고, 아파했던 존재였다는 걸 알려주고, 그래서 더 이입하게 한다. 같은 날 개봉했던 <자전차왕 엄복동>도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영웅의 서사를 보여줬지만, 조악한 만듦새 탓에 논란만 만든 것과는 비교가 되는 지점이다. 이 두 영화의 간격은 색상부터 시작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CG를 동원한 화려함과 흑백의 명암만 존재하고 있던 두 영화의 이미지는 영웅의 서사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항거>의 흑백 이미지엔 어떤 힘이 있던 걸까.

항거: 유관순 이야기


흑백 이미지의 의미

최초의 영화와 사진은 흑백이었다. 기술의 진보와 함께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에 흑백 영화는 과거의 유산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컬러 영화의 등장 이후에도 몇몇 감독은 흑백으로 영화를 연출했고,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고전기 영화를 향한 애정과 존경, 동경의 마음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아티스트>(2011)란 작품을 말할 수 있는데, 2012년 미국 아카데미 협회는 고전기 영화를 오마주한 이 영화에 작품상을 주기도 했다. 다른 이유는 흑백 이미지가 풍기는 느낌 탓이다.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바랜 느낌, 차분한 느낌을 주는 흑백의 이미지엔 특유의 감성이 있다. 흑백의 사진관이 지금도 트렌디한 장소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연출된 영화엔 색이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인물의 표정과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한, 흑백은 과거를 상징하기도 한다. 컬러 영화의 회상 장면에서 흑백을 사용하는 관습이 있으며, 이런 색상의 차이를 통해 관객이 영화의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 흑백 자체로 오래전의 일이라는 걸 표현할 수도 있어, 시대극에도 쓰인다.

– 흑백영화로 만들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계기는.
–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돈이 없어서. 왜냐하면 이게 제작비 5억원밖에 안 되는 저예산영화라서, 시대물을 저예산으로 찍다보면 컬러였을 때 어설픈 화면이 될까봐. 또 하나는 우리가 윤동주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학사모를 쓴 흑백사진이다.

씨네21 <동주> 현장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 인터뷰 중 2016.02.04. 장영엽 기자

한 예로,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연출할 때,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이 흑백이라 영화를 흑백으로 연출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런 흑백의 형식은 적은 제작비라는 한계 때문에 시도되기도 한다. 역시 <동주>에서 이준인 감독은 5억이라는 제작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흑백의 연출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항거>의 흑백 이미지

<항거>가 흑백의 이미지를 쓴 몇 가지 이유는 앞에서 말한 내용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흑백으로 표현된 유관순이란 인간의 표정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색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1919년, 20년이란 과거의 시간을 다루고,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 열사의 이미지도 흑백의 사진 자료이기에 적절해 보인다. 여기에 순 제작비가 10억으로 알려진 적은 예산 탓에 선택된 연출 방법일 수도 있다.조민호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몇 가지 이유를 더 알 수 있다.

<항거>의 언론 시사회에서 그는 “그 생지옥을 컬러로 표현했을 때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느낌을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내용을 보면, <항거>는 자극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온전히 유관순의 고뇌에 집중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 <귀향>이 자극적인 장면을 배치해 화제가 되었던 걸 기억해 보면, 무척 사려 깊고 절제된 연출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항거>가 보여준 흑백 이미지의 비밀

앞의 내용으로 <항거>의 흑백 이미지에 관해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영화엔 이상한 이미지가 있다. 이 영화엔 중간중간 컬러로 연출된 부분이 등장한다. 왜 <항거>는 이 부분을 컬러로 연출하고 있었을까? 이 영화의 컬러와 흑백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컬러로 연출된 장면은 형무소 이전의 시간이다. 영화가 다룬 시간 보다 더 과거의 시간을 컬러로 표현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영화가 과거 플래시 백에 흑백을 쓰는 것과 반대로, 이 영화는 기본 베이스가 흑백이기에 컬러로 시간을 구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추측할 수 있는 건, 유관순 열사가 가족과 함께 했던 시간, 그 시간을 행복했던 시간, 그녀가 뭔가를 꿈꿀 수 있던 시간으로 표현하기 위해 색깔을 가져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결함이 군데군데 있다. 행복했던 시간을 컬러로 표현했다기엔,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하는 유관순 열사의 모습도 컬러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가정을 무안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미지가 하나 남아있다. <항거>의 가장 마지막,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에서, 흑백이었던 영화는 컬러로 변환된다. 이 장면의 컬러는 시간의 구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이 순간의 엄숙한 분위기를 담는 데에도 컬러보다 흑백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조민호 감독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컬러와 흑백을 구분하고 있던 걸까.

항거: 유관순 이야기


모든 것을 종합해 두 가지 이유를 추측해봤다. 하나는 유관순 열사에게 자유라는 게 허락되었던 순간을 <항거>는 컬러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에 오기 전, 그리고 죽음 이후에야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색이 돌아오는 순간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를 되찾는 걸 보여준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형무소에서 보낸 날들은 자유를 뺏긴 잠든 시간이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 열사와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컬러로 표현된 장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이미지다. ‘3.1운동’ 하면 대표적으로 기억하는 위인 중 한 명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는 고등학생, 아우내장터, 3.1운동, 옥중에서의 죽음이 거의 전부다. 즉, <항거>에서 흑백으로 표현한 옥중에서의 시간은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모르고 있던 유관순의 시간이다. 조민호 감독은 관객이 망각했던 영웅의 시간을 기억하고, 더 알아보기를 바랐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에 우리가 직접 색을 입혀주기를 바라며 흑백 이미지를 활용했을 것이다.


<항거>는 흑백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이 영웅과 함께 고민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여백을 채워가며 몰입하게 하는 영화였다. 이와 비교해 <자전차왕 엄복동>은 화려한 스펙터클을 전시해 영웅의 승리,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다. ‘엄복동’이라는 인물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던 영화, 그리고 그에게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무분별한 스펙터클의 추구는 우직한 흑백 영화 앞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목격한 3월이다.

키노라이츠

키노라이츠 매거진 편집장 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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