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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부부 사이에도 대화가 필요해

살면서 당연하다고 믿은 것이 사실 나만의 착각이었다면 어떨까. 아마도 배신감, 수치심, 당황스러움, 슬픔 등이 밀려올 것이다. 특히 그 사실을 확인한 관계가 믿었던 부부 사이라면 그 감정은 몇 곱절 더해질 것 같다. 부부는 무촌이란 말이 있듯 참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다. 유행가 중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이란 가사가 문득 생각나기도 한다. 님과 남은 한 끗 차이, 언제라도 갈라설 수 있는 살벌한 사이임을 뜻한다.

할리우드의 금손 스토리텔러로 활동했던 윌리엄 니콜슨 감독은 부모의 이혼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출발은 자신이 쓴 희곡 ‘모스크바로부터의 후퇴’였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내가 제일 잘 연출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연극의 한계를 영상으로 풀었다. 영화는 성인이 된 자식의 시선에서 바라본 부모를 담고 있다.

자녀가 바라본 부부의 위기

사랑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29년 차 부부가 있다. 아내 그레이스(아네트 베닝)는 호탕한 성격이면서도 극도의 완벽주의자다. 오랫동안 시를 엮어 책을 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상대방도 자기 뜻대로 움직이길 바란다. 시처럼 운율을 맞추고 인생도 각 맞추는 걸 좋아한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인생을 원한다. 그래서일까. 항상 삶의 행복과 남편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무뚝뚝한 남편의 대답을 어떻게 해서라도 끌어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가 도발과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위키피디아를 편집하고 있다. 아내와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다. 아내는 정보를 계속 덧씌우는 이 작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수정하는 위키피디아 성격을 모르고 한 말일까. 이해 가지 않는 것은 굳이 이해하지 않으려 드는 아내가 못마땅하지만 티 내지 않기로 한다. 아내에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고 어차피 그런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은 30년 가까이 티격태격했다. 사랑에 대해서 서로 정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 에드워드는 사랑이란 알려고 하는 게 아닌 그저 느끼는 거라고, 아내는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내내 짜증과 불만만 가득하다. 남편은 아내가 항상 그럴 때마다 부담스러운 압박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이러다가 제명에 못 죽지 싶을 때도 있었다.

독립해 런던에 사는 아들 제이미(조쉬 오코너)는 애인과 사이가 좋지 못해 심란하다. 하지만 이번 주말 본가에 다녀와야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귀찮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던 찰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엄마와 이혼하고 싶다고 선언 같은 고백을 했다. 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망설이다 각자의 삶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고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기에.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절대 깨지지 않을 단단한 가족이라 믿어 왔건만 돌연 해체 선언은 성인이라고 해도 매우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쩌면 이 결혼의 증거 중 하나인 자식의 존재까지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엄마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섬세한 감정 연기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일품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29년이란 결혼 생활을 한 중년 부부에게 찾아온 위기를 아내, 남편, 자식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영화다. <결혼 이야기>의 중년 버전쯤 된다면 과한 표현일까.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대조적으로 다룬 탁월한 설정이다.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시라 할 만한 <패터슨>과도 비슷한 접점이 있다. 마음을 적시는 예이츠의 시 ‘한 아일랜드 비행사의 죽음 예견’과 더불어 여러 시를 인용해 세 사람의 복잡한 감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다. 장엄하지만 소박하기도 한 장소는 영국 남부 세븐 시스터즈의 하얀 절벽이다. 영화의 원제인 호프 갭(Hope Gap)이 장관을 이루는 해안 마을 시포드를 배경으로 한다. 이는 이혼하는 중인 부부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상징한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의 차이와 30년 가까운 세월의 무색함이 닮아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잔잔한 수면의 속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본인도 잘 몰랐던 감정은 의외로 타인을 통해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부부는 서로만 알 수 있는 복잡 미묘한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결혼이란 제도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기 위한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평생 아내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느라 힘들었던 남편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깨닫는다.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아내와의 갈등은 영화 내내 고조되지만 결국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영화는 과연 행복한 것과 괜찮은 건 뭐가 다를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점이 찾아오기는 할까?라는 의문을 던지며 각자에게 맞는 답을 찾길 바라고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에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선사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연히 기차를 잘못 타 여기까지 온 것뿐이라며 다독여 준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쉬고 싶다라는 말이 공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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