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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너무도 위대해서 위험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조커>의 개봉으로 미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개봉 당시 총기 난사 사고가 있었고, 그에 따른 예방 조치라 한다. 악당이 주인공이라 많은 우려가 있겠지만, 다행히 <조커>는 조커를 매력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그의 행위를 정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무섭고 위험한 영화라는 데엔 꽤 동의한다. 관람 후 깊은 감명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너무도 잘 만들었기에 이 위험성에 더 동의한다. <조커>는 너무도 잘 만든 작품이고, 그래서 최악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조커만큼 악당이 사랑받은 영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20년이 지나도 굳건한 팬층을 가지고 있고, 히스 레저의 조커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란 위대한 감독만큼 빛난 캐릭터로 회자된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아니었다면, <다크 나이트>는 평범했을 것이란 평도 있다) 여기에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코믹스 영화의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조커는 상업 영화 내에서만 평가받던 코믹스 영화를 예술의 영역에 발 딛게 했다.

배트맨이란 영웅보다 유명해진 악당 조커에겐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기괴한 분장,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기, 배트맨 앞에서도 당당한 카리스마 등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렇다면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이를 연민과 공감의 힘에서 찾았고, 그래서 이 조커가 위대하고 위험하다 말하려 한다.

악당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조커>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가 조커의 탄생을 어떻게 다루는지 봐야 한다. 재미있는 농담으로 타인을 웃기고 싶었던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왜 조커가 되었는가. <조커>는 아서의 본성이 악하거나, 특별한 힘을 얻어 조커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과 사회적 환경에서 조커의 탄생을 찾았다. 그리고 아서가 조커가 되어야만 했다고 설득한다.

아서는 이유 없이 웃음이 터지는 병을 앓고 있다.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웃지 않아야 할 때 웃는 그는 타인을 불편하게 한다. 다수의 사람이 그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이해해주지도 않는다. 이 웃음병으로 아서는 세상과 소통이 어렵고, 자신의 꿈도 펼치지 못한다. 그는 주목받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지만, 웃음이 터지는 타이밍이 남들과 다르다. 그리고 주목이 필요한 순간에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필요할 때는 터지지 않는 웃음처럼 말이다.

고담 시도 조커의 탄생을 등 떠민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매체를 통해 사회의 갈등을 들을 수 있는데, 고담 시는 사회 계층 간격이 크다. 상위 계층은 하위 계층을 얕보고 하위 계층은 상류 계층에게 불만을 말하면서, 이들은 점점 두 진영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상류층은 정치인을 그들의 영웅으로 내세웠고, 하층민은 나타날 그들의 영웅을 기다리며 예열 중이다. 광기 어린 광대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서가 주거하는 공간과 어머니와의 대화로 보건대, 그는 상류층 구성원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두 열악한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아서는 계층 간의 싸움에 큰 관심이 없고, 행동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첫 번째 살인의 동기도 계층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서 아서의 가족사는 그의 개인적 분노를 사회를 향한 분노로 전환시키는 촉매가 된다. 아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담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시의 대표가 되려는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이라 믿었다. 하지만 토마스 웨인에게서 부정당하고, 돌아오는 건 경멸의 시선과 폭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토마스 웨인은 아서의 어머니를 모욕한다.

이렇게 <조커>는 아서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유명한 코미디언이 되고자 하는 꿈,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번번이 막혔다. 코미디언과 한 명의 아들이 되기에 그는 너무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살인으로 그는 고담 시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이 된다. 누군가는 마스크 쓴 아서를 자처하며, 그의 범죄를 우상화한다. 영화 내내 존재감을 갈구하던 아서는 살인을 계기로 사회운동의 아이콘이 된다. 그 누구보다 유명해졌고, 마침내 함께 웃어줄 팬도 생겼다.

영화에서 아서가 평소 폭력을 즐겼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는 폭력을 휘둘렀을 때만 존재감이 있었다. 그에겐 폭력만이 탈출구로 보였다. <조커>는 그렇게 아서가 폭력을 하도록 떠밀고 있었고, 조커라는 악당의 등장이 필연적이라 말한다.

영화가 선택한 시점

여기서 더 생각해야 하는 건 카메라의 시선이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구타당하는 아서 플렉을 담는다. 그는 연민을 끌어내는 불쌍한 인간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고, 관객은 안타까움과 함께 그의 상황을 좀 더 좋아지길 응원하게 된다. 이후에도 카메라는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존재로 아서를 담는다. 그런데, 이는 누구의 관점에서 담은 이미지일까. 카메라가 사람의 눈이라면, <조커>는 누구의 눈으로 본 아서의 이야기일까. 아마도 아서의 눈일 것이고, 때문에 <조커>는 아서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중간중간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는 지점이 있는데, 여기서 아서의 시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목격할 수 있다.

<조커>에서 아서를 타인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크게 두 번 정도 있다. 그리고 이는 모두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서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게 TV에 방영되는 장면이다. TV에 제보된 아서의 모습은 영화 중에 봤던 것과 달랐다. 관객이 봤던 건 성공적으로 쇼를 마치고 응원을 받는 아서의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제대로 된 코미디를 보여주지 못했다. 두 번째는 아서가 총을 쏘는 장면이 중계되는 TV 쇼에 등장한다. TV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아서의 두 번째 살인엔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민낯이 있다. 제삼자의 입장, 그러니까 아서라는 인간의 시선과 밖에서 본 조커의 모습은 살인마일 뿐이다.
 
영화에서 내내 봐왔던 아서와 TV 화면 속 그는 달랐고, 그 차이만큼 관객은 아서의 시선에 몰입해 이야기를 봤다. 우리는 아서가 재구성한 이야기 속에 있는 그를 보고 있었고, 덕분에 그의 마음과 동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연민까지 느낄 수 있었다. <조커>는 그렇게 설계된 영화다.

시선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계단씬

앞서 말했던 아서의 시선과 제삼자의 시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조커>에서 가장 인상적인 씬에 등장한 계단인데, 조커가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에서 기묘함을 느꼈다. 이 계단은 상승과 추락의 느낌을 동시에 주는 독특한 미장센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아서가 계단을 올라갈 때는 한 남자의 처연한 뒷모습을 볼 수 있고, 조커가 계단을 내려올 때에는 한 괴물의 경쾌한 앞모습을 볼 수 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계단을 로우 앵글로 찍으면서 위와 아래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다.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마치 어딘가로 내려가는 느낌을 주고,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스크린 위로 올라오는 느낌을 준다. 즉, 아서는 위로 올라가고 있지만 지하의 심연으로 내려가고 있는 듯했고, 조커는 아래로 내려오고 있지만 정상에 도달한 듯했다. 이는 인물의 내외적 상황의 복잡함을 한 번에 보여준 걸출한 장면이다. 올라가던 아서는 도덕적으로는 고결했지만 사회적 존재감이 바닥이었고, 조커는 도덕적으로 타락했지만 사회에서의 존재감은 최고조였다.

앞서 조커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이미지와 TV를 통해본 그것이 달랐듯, 이 계단 씬도 시선에 따라 다른 걸 보고 느낄 수 있다. 그 장면을 보며 상승하는 괴물을 볼 수 있고, 한 인간의 추락을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다 느낄 수도 있다. 조커가 자신의 인생을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방황했듯, 한 인물의 다양한 면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씬이다. 물론, 아서와 조커가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다.

<조커>의 위대함과 위험함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히스 레저의 조커와 비교했을 때, 그 특별함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엄청난 광기와 카리스마를 보여줬고, 히스 레저의 엄청난 연기 덕분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많은 부분이 비밀에 가려 있었고, 이해하기엔 너무도 힘들었다. 다가가기 어려운, 그래서 더 위압적인 느낌의 캐릭터가 히스 레저의 조커다.

이와 비교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위압감은 덜하다. 대신, 관객이 조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아, 저런 상황이라면 저런 괴물이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라고 악에 공감하게 한다. 다가갈 수 없는 악과 다가가게 하는 악. 그게 히스 레저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가진 차이다.

이처럼 <조커>는 악에 이입하게 하는 영화였고, 그래서 위험하다. 폭력이 좋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 영화는 그것 밖에는 답이 없는 듯 설계했다. 폭력에서만 한 인간이 존재감을 느끼고 자아 성찰을 하게 만들었다. 관객은 아서의 폭력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잖아’라고 생각하고, 이후 그의 살인에 개연성을 부여하며 악의 탄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조커>를 보면서 느꼈던 어떤 충격과 전율 사이에 있던 내적 균열은 이런 이해에서 시작한다. 영화 속 많은 이들이 조커가 되는 것에 동참했듯, 누구든 조커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영화 관람 후, 인간의 삶을 뒤바꿀 동기가 이 세상에 너무도 많아 보였다. 어쩌면 수많은 범죄자들은 이미 자신의 생을 재구성해 자신만의 <조커>를 상영했을 지도모른다. 만약에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를 동정한다면, <조커>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조커>에 열광하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에 찬사를 보낸 뒤, 어딘가 불안하고 당혹스러움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조커>는 위대하고 위험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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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라이츠 매거진 편집장 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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