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라이터들이 남겨준 많은 리뷰는 키노라이츠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영화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키노라이츠를 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주죠. 그런 키노라이터들을 위해 ‘키노라이츠 매거진’에서는 특별한 시간을 준비했는데요. 좋은 리뷰를 더 많이 알리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번 주는 <가버나움>입니다.
자신의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는 소년의 이야기 <가버나움>을 향한 키노라이터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61명의 평가 인원 중 무려 59명이 초록불을 밝혀주셨고, 현재 키노라이츠 지수는 96.7%를 기록 중이며 평점도 4.17점으로 매우 높습니다. <가버나움>은 제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화제가 되었는데요. 국내에서는 <버닝>과 황금종려상 후보로 함께 언급되기도 했죠. 그 외에도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후보 등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끌어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키노라이터들은 <가버나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글의 맞춤법을 일부 수정했으나,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가난을 포르노화하는 나쁜 신파극
– 토비 (빨간 불, ★ 평가 없음)
원문: https://kinolights.com/review/34933
갈릴리 호수 북부에 위치한 가버나움. 이곳은 예수가 머물며 숱한 기적을 행한 곳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었던 열병을 치유해주었고, 중풍 환자를 낫게 하였으며, 진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가 행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수의 예언대로 가버나움은 7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종교인들의 성지순례 단골 코스가 되었다.
영화의 시선은 가버나움보다 조금 더 위에 위치한 레바논으로 향한다. 영화의 배경도 아니고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성경 속 몰락한 마을 가버나움은 더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도시 베이루트에서 발견된다. 빈민과 난민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는 길거리에 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하는 아이들이 있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월경만 시작하면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는 소녀들이 있으며, 복지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난민들이 있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년 자인도 이 부류에 속해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간다. 동네 슈퍼마켓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받아오고, 동생들과 길거리에 나가 비트 주스를 팔기도 하며, 가짜 처방전으로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유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고작 닭 몇 마리에 동생 사하르를 동네 슈퍼마켓 주인인 아사드에게 결혼시키는 부모는 자인이 사는 게 개똥 같다고 말하게 만드는 증오의 대상이다.
영화는 그런 자인의 뒤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바짝 뒤쫓는다. 바퀴맨 할아버지가 놀이공원에서 일하면서 바퀴벌레같이 질긴 삶을 이어가는 세상, 라힐이 요나스를 힘겹게 먹여 살리는 세상, 라힐이 사라지고 난 후 요나스를 부양해야 하는 세상을 자인이 마주할 때마다 카메라는 그 불행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거리의 소음까지 담는 음향 연출법은 현장감을 담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더불어서 국가채무비율 세계 4위 레바논의 현실을 직시한다(참고: 파이낸셜뉴스 기사(http://www.fnnews.com/news/201901091418447273).
심히 불편한 건 이 영화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다. 따지고 보면 영화의 메시지는 법정 시퀀스에서 모두 토해진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곤에 고통받는 자인을 비추는 플래시백이 없어도 관객은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대부분 다 알아차릴 수 있다. 플래시백은 잔인한 현실을 묘사하는 본래 의도를 넘어 인물을 어디까지 학대할 수 있나 과시하는 가난 전시회, 불행 전시회처럼 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인은 서사의 주체가 아니라 연민을 유발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버스에서 잠이 든 자인과 요나스를 비추는 장면 등에서 극적인 음악을 사용할 때나, 자인의 뒤를 쫓던 카메라가 악착같이 생의 유지를 위해 힘쓰는 자인의 위에 올라서 버즈아이뷰 숏으로 꼬불꼬불 미로 같은 빈민촌을 비출 때 그 자극성이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아이들의 눈을 빌림으로써 프레임에서 현실을 의도적으로 밀어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와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이다.
감정의 격랑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영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감상주의적 엔딩의 유려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아역배우들의 연기다. 가난을 포르노화하며 약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심드렁해 하면서도,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하층민의 삶을 와닿게 만드는 아역배우들의 연기에는 가슴이 저절로 반응한다. 실제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다가 캐스팅된 자인 알 라피아(Zain Al Rafeea, 자인 역)에게 쏟아진 찬사에 동조할 수밖에 없고, 한 살배기 아기 요나스 역의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Boluwatife Treasure Bankole)은 연기 디렉팅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장면에 필요한 연기를 기가 막히게 수행해 놀라움을 선사한다.
Empathy not sympathy. 우리말로 ‘동정하지 말고 공감하라’라는 의미이다. 복지론에서 처음 등장한 이 말은 문화예술에서 약자를 다루는 태도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윤리비평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었다. 동정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거리감이 전제되어 있다. 반면에 공감은 약자와 눈높이를 일치시킴으로써 가능하고 연대를 전제로 한다. 동정보다 공감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동정이 시혜적 도움밖에 주지 못할 때 공감은 약자에 대한 실질적 접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럼 둘 중 <가버나움(کفرناحوم)>이 호소하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이 <가버나움>을 보고 느껴야 하는 건 야트막한 감정 자극이어야 하는가. 나딘 라바키(نادين لبكي)에게 묻는다.
토비님은 <가버나움>의 카메라가 과하게 가난과 비극을 전시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해주셨습니다. 더불어, 자인이라는 캐릭터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연민의 정서를 유발하고, 자인이 영화가 원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이용됐다고 말씀해주셨죠. 마지막 문단은 더 인상적인데요. 동정과 공감이란 단어를 비교하며, 영화가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나딘 라바키 감독에게 직접 물으며 글을 맺어주셨습니다.
현실을 비추는 카메라, 이를 편집해 이익을 얻는 영화, 그리고 이를 소비하는 관객 등 영화에 얽힌 태도와 윤리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관객은 부조리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도 있지만, <가버나움>은 다큐멘터리적인 연출로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려 했기 때문에 현실과의 관계, 윤리의 문제에서 완벽히 자유롭지는 못할 듯합니다. 토비 님 <가버나움>의 감동이 남긴 흔적들에 관해 조금 더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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