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는 문을 두드리는 은희(박지후)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열리지 않는 문을 뭔가에 홀린 듯 두드리던 소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집을 떠난다. 집을 잘못 찾았던 거다. 잘못된 집으로의 노크와 외침, 그리고 문을 여는 데 실패한 장면으로 시작한 <벌새>. 영화는 이후에도 세상을 향한 은희의 노크와 외침, 그리고 실패로 이어진다.
영화는 1994년에 은희를 스친 것들을 비춘다. 겉으로는 카세트테이프 등의 문화를 소환하며 향수에 젖게 하는가 싶더니, 당시 사회에 깔려있던 그림자도 하나씩 꺼낸다. <벌새>는 가부장제, 학벌주의, 재개발, 그리고 이를 받치고 있던 ‘돈’이라는 최상위 포식자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여기엔 조금씩 무너지고 있던 국가가 있고, 중산층을 꿈꾸는 가족의 일원인 은희는 이를 목격하며 94년의 하루하루를 보낸다.
은희 내적으로는 ‘마음을 알아주는 자’를 찾기 위한 여정이 펼쳐진다. 가족, 친구, 후배, 선생님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녀는 다양한 인물과 소통을 시도하고, 거기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그녀만의 안식처를 찾기 위한 이 여정은 성장통이라기엔 너무도 아프다. <벌새>엔 소리도 없이 무너지던 소녀의 세계가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소녀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지만, 이는 성장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으로 보였다.
<벌새>는 한 국가와 소녀가 요동치던 1994년의 어떤 순간을 떼어 온 영상 클립이다. 요동친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밖으로는 잘 표출되지 않는 조용하고 기이한 영화다. 그리고 종종 인물들에게는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벌새>엔 당시 사회가 제시한 삶의 기준을 충실히 따랐던 인물이 다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한 중산층의 아름다운 삶을 쫓던 이들 중 그 누구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특히, 은희네 가족이 그랬다. 감정의 변화가 가장 컸던 은희마저도 할 수 있던 것은 소극적인 일탈이 전부였는데, 이는 당시 사회가 주입한 가치가 얼마나 지배적이었고 억압적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벌새’는 꿀벌처럼 꿀을 빨아 먹는데, 꿀벌보다 훨씬 더 부지런히 날개를 움직인다고 한다. <벌새>에서 은희네 가족은 일반적인 중산층처럼 살고 싶었고, 그래서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 중산층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은희는 자신의 피난처를 찾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이런 모습에서 김보라 감독은 ‘벌새’를 떠올린 게 아닐까.
첫 장면에서 은희가 집을 찾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강남이라는 공간에 똑같은 형태를 가진 집, 중산층을 꿈꾸던 그 공간에서 은희는 길을 잃었다. 모두가 같은 가치를 추구하던 공간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소녀의 이야기. 분주히 움직였음에도 결국은 강남의 중산층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이 무너지고 있던 소녀의 이야기. 이렇게 <벌새>는 과거를 추억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던 시기를 통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