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해수의 아이>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 대상을 수상한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은 올해 신작이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다시 부천을 찾았다. 그의 신작 <항구의 니쿠코>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녀의 성장과 내적인 갈등 그리고 진정한 화합의 모습을 담아내는 영화다. 여성서사에 기반을 두면서 소년장르가 보여주는 성장을 유쾌하면서도 서정적인 감성으로 담아낸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극명한 모녀 캐릭터로 웃음과 그 아래에 가려진 갈등을 보여준다. 니쿠코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가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돌아온 느낌을 주는 캐릭터다. 니쿠코의 삶을 기구하기 짝이 없다. 어린 시절 집에서 가출한 뒤 못된 남자들만 만나 돈을 빼앗기고 사랑에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을 주고 웃음을 잃지 않는 긍정적으로 보면 정이 많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철이 없게 느껴지는 캐릭터가 니쿠코다.
스스로를 명랑한 뚱보라고 말하는 니쿠코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눴던 소설가 남자가 고향으로 간다며 자취를 감춘 뒤 그를 찾아 한 항구마을로 온다. 이곳에 정착한 니쿠코는 고기집에서 서빙 일을 하며 배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니쿠코의 딸 키쿠코는 엄마와는 정 반대의 캐릭터다. 우선 외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뚱뚱하고 미녀라고 보기 힘든 니쿠코와 달리 키쿠코는 마른 체형에 운동을 잘하며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키쿠코는 표면적으로는 니쿠코와 잘 지내는 거처럼 보인다. 여느 작품이 그러하듯 다소 철이 없는 부모 아래에서 자라 일찍 철이 들은 자녀의 모습을 보인다. 초등학생의 나이에도 니쿠코를 위해 요리를 준비하는 건 물론 맹장염에 걸린 상황에서도 주변에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혼자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허나 그 이면에는 소년장르가 보여주는 사춘기 시기의 내적 갈등이 숨어 있다.
사춘기 시기는 또래 집단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이성에 호감을 느낄 때이다.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던 시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외부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고민한다. 키쿠코는 뚱뚱하고 칠칠맞은 니쿠코를 부끄럽게 여긴다. 전생에 대해 말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니쿠코는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기에 기구한 삶을 사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가 하면 친구들이 혹시 니쿠코를 보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작품은 영리하게도 니쿠코와 키쿠코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닌 친구들과의 일화를 통해 키쿠코가 내면의 불만을 정리하도록 한다. 전학 온 첫날부터 친해진 단짝 마리아와의 갈등은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란 걸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니쿠코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불필요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사춘기 시절 모두가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니쿠코의 존재를 크게 여겼던 키쿠코는 이 근심을 점점 내려놓는다.
키쿠코가 관심을 보이는 소년 니노미야는 ADHD 증상의 일종으로 무의식적으로 웃긴 얼굴 표정을 짓는다. 이 이상한 니노미야의 행동을 키쿠코는 따라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빨리 성숙해진 키쿠코는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한다. 웃긴 얼굴 표정을 짓는 순간은 잠시 자신을 내려놓고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을 찾는 시간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니노미야는 마을이 지닌 공동체의 가치를 키쿠코에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키쿠코가 도마뱀, 갈매기, 길고양이 등이 말을 하는 거처럼 혼잣말을 하는 장면은 남모를 고민을 품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남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을 인간이 아닌 대상에게 투영하며 잔잔한 전개의 영화와 달리 키쿠코의 내면은 강하게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세심한 포인트 하나하나는 극적인 전개는 잔잔하게 유지하면서 심리적으로 키쿠코에게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코드들을 형성한다.
작품은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따뜻한 느낌을 준다. 특히 니쿠코의 풍만한 몸을 과장되게 표현하는데 이것이 포근함을 주는 포인트로 작용한다. 니쿠코는 고전적인 여성상에 가깝다. 순종적이고 긍정적이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허나 동시에 자립심이 강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작품이 보여주는 가족과 공동체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가치이나 이런 현대적인 가치관을 캐릭터에 함께 담아내며 의미를 형성한다.
이 작품은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전작 <해수의 아이>와도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해수의 아이>가 바다를 소재로 우주란 공간을 담아내며 자연과 인간이란 거대한 공동체에 대해 말했다면 이 작품은 항구도시에 살아가는 가족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대해 말한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말처럼 항구 같은 여자 니쿠코가 키쿠코라는 배를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에 저물어 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준다.
환상적이고 신비로웠던 전작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이번 신작에 다소 당황할지 모른다. 원작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감독들의 경우 고유한 스타일보다는 작품에 맞춘 연출을 선보인다.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무기인 유머는 물론 <해수의 아이>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던 표현력 역시 적절하게 가미했다. 참고로 올해 포스터와 인트로 영상 역시 맡으면서 올해 BIAF2021에 큰 선물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