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검사인 실존인물 시라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소설 <달나라 여행기>로 유명한 시라노는 큰 코에 호탕하고 강직한 성격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희곡은 그의 외형과 성격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를 선보인다. 이 희곡에 바탕을 둔 2018년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라노>는 이 배우의 캐스팅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그 주인공은 피터 딘클리지다.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주연을 맡았던 프랑스 영화를 비롯해 시라노의 캐릭터 하면 부각되었던 것이 큰 코였다. 이 영화는 왜소증을 지닌 배우를 캐스팅하며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피터 딘클리지는 외형에서 오는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킨 배우다. 중후한 목소리와 또렷한 발성, 깊이 있는 연기력을 통해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를 연달아 선보였다.
피터 딘클리지와 록산 역의 헤일리 베넷은 원작 뮤지컬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다. 뮤지컬의 주연을 그대로 캐스팅하며 위험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했다. 앞서 <디어 에반 핸슨> 역시 벤 플랫을 주연으로 내세우며 뮤지컬의 감동을 스크린에 재연하려는 노력을 선보인 바 있다. 각본 역시 피터 딘클리지의 부인이자 뮤지컬에 참여한 에리카 슈미트가 맡았다.
‘시라노’ 역시 마찬가지다. 외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시라노는 사려 깊고 진중하면서 낭만적인 내면을 지녔다. 작품은 원 희곡의 스토리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시라노는 용맹한 군인이자 감각적인 시인이다. 그는 동네에서 함께 자란 록산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 때문에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어느 날, 록산은 시라노에게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시간을 내달라고 한다.
내심 록산이 자신에게 고백하는 게 아닐까 기대했던 시라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록산이 첫눈에 반한 남자가 시라노가 속한 근위대 소속의 크리스티앙이라는 것. 이에 시라노는 록산의 사랑을 위해 크리스티앙의 머리가 되어주기로 한다.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록산에게 편지를 써주며 둘의 사랑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 크리스티앙의 머리와 입이 되어주는 대신 그의 얼굴로 록산에게 대신 마음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의 매력이라면 단연 대사다. 희곡이 원작인 만큼 사랑에 대한 로맨틱한 표현이 주를 이룬다. 시라노가 자신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대사들은 그 자체로 낭만적인 감성과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이 힘의 원천은 공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오만과 편견> 등 사랑과 관련된 고전들은 시대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시대에 따라 사랑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적인 단점으로 인해 사랑을 두려워하는 시라노의 모습은 현대의 다포세대와 연결점을 지닌다. 현실적인 여건을 이유로 사랑에 대한 도전을 망설이며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확신 없이 보낸다. 피터 딘클리지는 이 이야기에 대해 ‘모든 캐릭터에게 사랑은 고문과 같다’며 ‘오늘날 진짜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은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진실 된 자신을 보여주는데 두려움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또 다른 지점이라면 가상의 정체성이다. 현대인은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자신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가공된 모습이 자신이라 여기며 그 모습에 집착하기도 한다.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건 시라노의 문체라는 생각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입과 손이 되어야만 록산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생각하며, 록산 역시 가난을 이유로 귀족 드 기슈에게 거짓된 사랑을 보여준다.
이 거짓된 사랑의 정체성을 탈피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로맨스의 묘미를 보여준다. 진실된 사랑이란 주제를 지닌 작품 중 ‘시라노’가 유독 돋보이는 이유는 세 주인공이 모두 이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시라노 뿐만 아니라 록산과 크리스티앙 역시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에 문제를 겪는다. 현대에도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코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미덕을 선보인다.
아쉬운 점은 뮤지컬이 지닌 매력이다. 뮤지컬 장르의 영화임에도 뮤지컬 장면 자체가 적은 건 물론 그 장면 자체도 큰 쾌감을 주지 못한다.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이는 제빵장면이나 군대장면 등 뮤지컬이 펼쳐지는 장소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건 물론 리듬감이나 감성의 깊이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최근 개봉한 같은 리메이크 뮤지컬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비교했을 때 연출적인 측면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