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물의 대표적인 시리즈이자 영국이 자랑하는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 첫 번째 시리즈를 선보인 후 현재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2005년 6대 제임스 본드로 임명된 다니엘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기존 시리즈와는 다른 색깔을 보여주며 호평을 들은 바 있는 이 작품은 시리즈의 25번째 작품에서 6대 본드와 이별을 고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봉이 무기한 미뤄졌던 이 작품은 9월 29일 세계 최초 대한민국에서 개봉을 택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오직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위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 캐스팅 당시 논란이 많았던 배우다. 평균 185를 자랑하는 큰 키에 한 눈에 봐도 매력적인 흑발의 미남들이 연기했던 제임스 본드를 180이 안 되는 키에 금발머리, 여기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배우가 연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스 캐스팅 논란에 시달리던 다니엘 크레이그는 본인의 첫 번째 007 작품인 <카지노 로얄>에서 모든 우려를 불식시켜 버린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007 시리즈는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이란 평을 받았다. 냉전시대는 끝이 났고 기존 시리즈의 패턴을 반복하는 색다르지 않은 007의 전략에 염증을 표했다. 이에 다니엘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한 007 시리즈는 ‘본 시리즈’가 보여줬던 육탄액션에 중점을 둔 액션과 스파이의 내면에 중점을 둔 감정표현을 선보였다.
특히 본드걸이 죽고 그 슬픔을 간직하며 내면의 아픔을 겪는 본드의 모습은 기존의 바람둥이 이미지였던 제임스 본드와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줬다. 이번 작품 역시 이런 본드의 내면에 중점을 둔다. <007 스펙터> 이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본드와 마들렌의 이별로 시작된다. 본드는 의문의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그 무리 중 일원에게서 이 일이 마들렌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첩보요원인 본드는 마들렌의 해명을 무시한 채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007에서 은퇴한 본드는 쿠바에서 홀로 쓸쓸히 생활하던 중 새 임무를 받게 된다. 런던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던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무기를 강탈한 조직이 스펙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이에 본드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고 그곳에서 마들렌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번 작품을 다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제임스 본드의 마무리로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감정적인 측면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표 제임스 본드는 내적인 고민과 갈등을 표출하는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 특유의 매력적인 유머도 지니고 있지만 요원이란 직업에 어울리게 내면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기존 제임스 본드와 달리 고통, 상처, 우울과 같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여기에 도구를 주로 활용했던 세련된 액션과 달리 몸을 활용한 육탄액션을 주로 선보인다. 근육질 몸매에 다부진 체형을 지닌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런 액션의 질감을 200% 살려내는 배우다. 몸에 상처를 입고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다니엘 크레이그 표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번 작품은 이런 측면을 강하게 보여준다. 후반부 액션장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육탄액션은 빛을 내며 그가 만들어낸 액션의 묘미를 선보인다.
여기에 베스퍼 린든을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아닌 인간적인 제임스 본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여느 인간이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그의 모습은 왜 전 세계가 새로운 본드에 열광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은 <카지노 로얄>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구성을 선보이며 다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마무리임을 느끼게 만든다.
007 시리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본드카 DB5를 50년 만에 컴백시킨 추격액션이나 30년 만에 다시 등장한 본드카 애스턴 마틴 V8 등 시리즈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카체이싱, 첩보전, 육탄전 등 다양한 액션을 선보이는 점은 포인트다. 다만 액션은 물론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완벽하게 만족하기 힘들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먼저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며 이번 작품에서 빌런을 맡아 기대를 모았던 라미 말렉은 미비한 존재감을 보인다.
섬뜩하기 보다는 기괴한 악역 캐릭터를 선보였는데 큰 매력을 주지 못하는 건 물론 그가 설계한 작전 하나하나가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다이 하드3>의 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우아한 악역을 기대했던 거 같지만 그만큼의 매력을 뽑아낼 만큼 캐릭터 설정에 열과 성을 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새로운 007, 노미의 등장은 매력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노미의 캐릭터 역시 어떻게 하면 제임스 본드와 매력적으로 엮어낼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짧은 순간 등장해 본드와 협력을 펼친 팔로마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마들렌을 중점에 둔 드라마를 전개하며 그만큼의 감정을 본드와의 사이에서 뽑아내는 점은 성공하나 첩보물 특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이것이 한 편의 007 영화로는 아쉬우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위한 완벽한 마무리로 보이는 이유다.
007 시리즈는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게 밀릴 뻔했던 시리즈의 위치를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색깔을 바꾸면서 다시 유지해내는데 성공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무려 16년을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며 역대 최장수 제임스 본드를 해낸 건 물론 이안 플레밍의 소설 원작과 가장 가까운 제임스 본드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제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찾아야만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시리즈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만의 제임스 본드로 입장해 퇴장을 한 이 배우를 위한 순간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