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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추앙’에 버금가는 ‘붕괴’의 다른 쓰임새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은 보고도 못 본척할까.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거나, 안정적 상황을 흐트러 놓기 싫어 거짓말로 둘러댄다. 어른들은 그렇다.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지 못하고 숨기기에 바쁘다. 반대로 말하는 것도 좋아한다. 좋은데 싫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싶다. 혀로 내뱉은 말을 그대로 다 믿는 어른은 드물다. 적당히 상황과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의역해서 듣는 귀가 필요하다. 그래서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해준과 서래처럼 말이다.

특히 나이 먹을수록 고려해야 할 것들이 생기고,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커진다. 나 혼자 짊어지면 끝나는 짐이 아니다. 순간의 선택으로 가족, 친구, 지인의 삶이 도미노 쓰러지듯 영향 받는다. 선택의 부작용은 스트레스로 치닫고, 마음의 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참 고달픈 일이다.

<헤어질 결심>의 말끔한 형사 해준(박해일)과 중국 미망인 서래(탕웨이)도 이런 삶을 살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던 둘은 서래의 남편이 추락사하면서 얽힌다. 남편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슬퍼하지 않는 아내. 해준의 의심은 관심이 되고 탐색전을 펼치다가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을 맞는다.

자신이 의심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형사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는 서래는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삶의 고난이 서려 있는 인물이다.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고 품위 있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해준은 늘 정갈한 차림으로 수사에 임하는 베테랑 형사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길티 플레저가 있다.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만 행복한 남자다. 직업적 사명인지 개인적 성향인지 모를 탐구심과 호기심 많다. 불면증이 있었지만 서래를 만나면서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예의 바르고 청결하고 형사보다 시인이 잘 어울리는 로맨티시스트다.

박찬욱 감독의 장기와 새로운 시도

<헤어질 결심>은 6년 만의 신작이자 칸 국제영화제의 감독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16년 만에 15세 관람가를 받았을 만큼 선정성과 폭력성이 낮다. 으레 박찬욱 감독 작품에서 기대하는 분위기와는 같은 듯 다른 결이면서도 꽤나 에로틱하다.

수사극과 멜로, 블랙코미디와 누아르가 공존하고 있다.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며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수사물처럼 보이지만 점점 사랑이 깊어지는 로맨스물이다. 관객도 스스로 그 사랑에 빠져버려 동화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무엇보다 매혹적인 미장센이 꽉 채우고 있다. 역시나, 박찬욱 영화답다.

영화 속 대사처럼 꼿꼿해서 우아하고,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한다’라는 대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절절한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휘몰아치는 격정보다 은근하고 섬세한 감정 놀이가 전반적인 흐름이다. 데이비드 린의 <밀회>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듯 클래식하다. 끊임없이 서로를 훔쳐보는 관음의 시선은 <이창>이, 불륜 관계지만 고급스러운 화법은 <밀회>가 연상된다.

‘추앙’에 버금가는 ‘붕괴’의 쓰임새

한국말이 서툰 서래 때문에 미스터리함은 더욱 커진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쓸 때가 많아 오히려 집중하게 된다. 흔한 대사도 서래의 입으로 나오자 아우라를 갖는다.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라던 서래는 사랑한다는 말을 고급 한국어로 내뱉는다. “마침내, 죽을까 봐”처럼 맞지 않는 어법은 묘한 이질감과 연민을 일으킨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시인 같은 형사가 사랑에 빠진 서래를 향해 내뱉은 말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추앙’버금가는 ‘붕괴’는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문학적 단어다.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 붕괴되면서 비로소 마음은 짙어진다.

이 모호함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138분이란 시간 동안 안개 낀 길을 걷고 있는 듯 몽환적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다르게 쓰이는 변주를 만끽할 수 있다. 서래의 집 벽지는 파도의 형상이기도 하고 산의 모양이기도 하다. 서래는 초록색이기도 하며 파란색이기도 한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 고전을 답습하고 있지만 디지털 기계를 적극 활용하고 있어 신비로움이 커진다.

하지만 엄격하게 전반부(부산)와 후반부(이포)로 나뉘는 특성도 있다. 충성심 강한 해준의 부하직원 둘은 거울처럼 설계했다. 전반부 키 큰 남자였던 부하직원(고경표)은 후반부 키 작은 여자(김신영)로 대체되어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준다. 김신영은 박찬욱 감독이 오래전부터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팬이었고, 적지 않은 분량으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는 신스틸러이기도 하다.

보고도 못 본 척, 안개 같은 관계

영화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러닝타임은 꿈 꾼듯했다.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와 마주하게 될 습하고 끈적한 공기는 아직 영화와 헤어질 수 없는 마음과 혼연일체 되어 버렸다. 엔딩 크레딧을 타고 흐르는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까지, 마침내 잊지 못할 순간을 마련해 준다.

안개는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다. 마음과 진실을 감출 수 있는 연막이자 끊임없는 갈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안개의 도시 이포가 무진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안개. 시간이 지나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면 바로 <헤어질 결심>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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