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와 200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파괴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폭발력 있는 액션을 선보였던 감독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중심이 히어로물로 넘어오면서 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그 시절 블록버스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인물이다. 그의 신작 <문폴>은 ‘역시 롤랜드 에머리히’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그의 장단점이 모두 담긴 영화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달이 지구로 추락하는 최악의 상황을 다뤘다.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2012>에서 지구 멸망 예언의 실현을 선보인 롤랜드 에머리히 다운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달의 궤도가 바뀌면서 지구는 달과 충돌 후 전 인류의 멸망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든다. 달의 파편이 지구로 떨어지는가 하면 쓰나미가 몰아친다. 후반부에는 중력의 작용과 산소가 사라지는 현상도 보여준다.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의 블록버스터를 그대로 선보이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독립 제작 영화 역대 최고 제작비를 기록한 이 영화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만큼 방대한 스케일을 선보인다. 지구를 향해 달이 다가오면서 발생하는 재난 상황들을 폭발력 있게 담아내는 건 물론 우주를 향한 모험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며 아이맥스 플랫폼에 맞는 규모와 위용을 선보인다.
동시에 단점으로 언급되는 측면 역시 고스란히 답습한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커리어를 거듭하며 성장을 보여준 감독과 거리가 멀다. 본인이 지닌 스타일이 뚜렷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창조해 왔다. 이 작품은 실패한 인생을 살아온 세 사람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다룬다. 이들은 각자의 가정과 직장에서 문제를 겪는다. 이는 롤랜드 에머리히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 설정이다.
이들 각자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구성을 하다 핵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나로 모은다. 누명을 쓰고 나사(NASA)에서 해고당한 우주비행사 브라이언, 브라이언의 친구이자 그의 누명을 벗겨주지 못한 나사 부국장 파울러, 달에 대한 음모론을 믿으며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고 있는 닥터 하우스맨은 실패자들이 영웅이 되는 언더독의 신화를 따른다. 이 전형적인 구성은 가족주의와 희생정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 주인공을 이끄는 원동력은 가족이며 가족과의 갈등과 사랑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을 차지한다. 문제는 이 오래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이 후반부 파괴력을 반감시킨다는 점이다. 후반부는 달로 떠난 브라이언 일행과 브라이언의 아들과 파울러의 아들이 벙커로 가는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이 된다. 전자가 SF와 미스터리의 흥미를 준다면 후자는 재난 스릴러의 묘미를 선사해야 한다.
헌데 이 후자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며 다소 지루함을 유발한다. 이는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대가이며 이로 인해 극 후반부는 물량으로 몰아치는 광경만 존재할 뿐 감정적인 격화나 쾌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다만 전자에 해당하는 미스터리는 롤랜드 에머리히가 시도한 변주라 볼 수 있다. 달이 인공구조물이란 가설을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을 찾아가는 상상력을 펼친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드니 빌뇌브, 리들리 스콧처럼 SF 장르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꾸준히 시도해 온 감독이 아니라는 점에서 깊이의 아쉬움은 따른다. 다만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오락성의 측면에서 기존과 다른 무기를 선택하며 신선함을 준다. 그 날이 매섭지는 않지만 시도만으로 시선을 끈다. 우주를 향한 만큼 이에 어울리는 상상력을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노력한다.
<문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류가 히어로물로 정착한 현대에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딥 임팩트> 등 우주에 의해 지구가 멸망 위기에 처하는 시나리오를 그렸던 90년대~200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매력을 담아낸다. 비록 그 표현에 있어 현대의 관객들이 느끼는 재미에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자신만의 외길을 묵묵히 걷는 감독의 뚝심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