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방영된 KBS의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그 가능성과 아쉬움을 동시에 보여줬다. 주상욱의 이방원을 메인으로 내세우며 신선함과 여전한 완성도를 자랑했지만, 2014년 <정도전>을 시작으로 <징비록>, <장영실>까지 연달아 조선시대에만 머무르며 아쉬움을 자아냈다. 특히 여말선초는 수많은 작품들이 다뤄온 시대인 만큼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평도 받았다. 이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2023년, KBS는 새로운 대하드라마를 선보이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로 <고려 거란 전쟁>이다. KBS가 공사창립 5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이 작품은 <만달로리안>이 사용했던 버추얼 프로덕션이라는 가상 촬영 기법을 활용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더하고자 했다. 총 270억 원의 제작비로 편당 제작비 기준 KBS 대하드라마 최대 규모를 기록하며 아낌없는 투자로 성과를 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에 맞춰 기존과 달리 KBS2 작품편성은 물론 넷플릭스 스트리밍을 택하며 대중성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 성과는 1화부터 엿볼 수 있다. 대하드라마로 두 번의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사극의 왕으로 불리는 배우, 최수종이 배역을 맡은 강감찬을 내세운 전투씬을 도입부로 택하며 시작부터 몰입을 더한다. 강감찬과 대립하는 거란의 노장군 소배압의 등장과 <반지의 제왕>의 로한 기병대를 연상시키는 고려 기병대의 등장 장면으로 앞으로 펼쳐질 전투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1화부터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드라마의 공식에 충실한 작품이 다음에 활용하는 건 역사라는 팩트다.
고려시대는 선비들의 나라로 불렸던 조선에 비해 성적으로 더 자유로운 사회였다. 길거리에서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과 남녀의 정분 다음 등장하는 건 남색을 즐기는 목종의 모습이다. 조선이라면 나올 수 없었을 이 그림은 오랜만에 시대의 변화를 추구한 대하드라마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목종이 지닌 독특한 캐릭터성 역시 극적 재미의 요소다. 막강한 정통성을 지닌 왕이었지만 고려왕조 최초 폐위와 유배를 당한 아이러니한 존재다.
그 강한 정통성 때문인지 거란의 침략이 예상되는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 유흥을 즐기며 모든 문제를 신하들한테 떠넘긴다. 남색을 밝혔다는 점은 천추태후와의 갈등을 유발하며 궁중 암투극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목종이 후사가 없자 천추태후는 남총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고자 한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목종은 김씨의 나라가 되는 걸 막고자 어머니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신선함을 주기 위한 시도는 후에 현종에 즉위하는 대량원군 역의 김동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최수종과 이원종을 필두로 사극에서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배우들은 물론 김동준, 지승현, 이시아 등 신선한 배우들을 더하며 그 조화를 추구했다. 세 명의 메인 주인공 중 현종 역의 김동준과 양규 역의 지승현은 주로 현대극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배우들이라는 점에서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캐스팅 시도부터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대하드라마가 현실에 전하는 메시지다. KBS 대하드라마 중 마지막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정도전>이다. 여말선초 배경과 정도전이라는 익숙한 인물을 소재로 했음에도 큰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현실에 전하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정치에 대한 혐오가 최고조로 올랐던 시기였다. 이럴 때 치열한 정치싸움을 보여주며 무엇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길인지 고민하게 만든 <정도전>의 연출 방향은 큰 호응을 자아냈다.
<고려 거란 전쟁>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코리아(KOREA)로 불리게 된 고려(고려의 영어 표기인 ‘Koryo’에서 전화(轉化)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한류열풍이 뜨거운 이때, 망각하기 쉬운 국가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역사의 한 페이지는 그간 대한민국이 겪어온 사건과 민족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거란의 침략은 그간 수많은 외세의 공세를 겪어야만 했던 역사를 보여주고, 강감찬을 비롯해 온 백성이 힘을 합쳐 이를 이겨내는 그림은 한강의 기적과 IMF의 극복을 이뤄냈던 의지와 승리의 정신과 연결될 수 있다. 더해서 강조의 정변과 김훈.최질의 난은 묘하게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의 군부독재정권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과연 작품이 마지막 순간 거란과 고려 사이의 전쟁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여부 역시 관심이 주목되는 바이다.
KBS는 올 한 해 큰 홍역을 치렀다. 수신료 분리징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고, 탄탄한 시청률을 자랑했던 주말 드라마까지 부진을 겪으며 예능과 드라마 모두 불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수신료의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며 위기에 몰린 이때, KBS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를 지닌 대하드라마를 무기로 내세웠다. 1화부터 빛을 발휘한 이 혼신을 다한 전력이 32부작의 마지막까지 웰메이드로 끝을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