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니콜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아내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내는 목숨을 건졌지만, 사회복지과에서는 아이들이 받은 충격을 이유로 니콜라가 자격을 갖출 때까지 양부모에게 보내는 걸 택한다. 니콜라는 경비원의 말을 통해 사회복지과장이 자신의 고향으로 아이들을 보내 국가지원금을 타먹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 말을 듣고 분개한 니콜라는 지방행정의 부패함을 알리고자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걸어가 장관을 만나기로 한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점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왜 니콜라의 아내는 자식들 앞에서 분신자살을 택한 걸까. 두 번째. 사회복지과장이 니콜라에게 말한 자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 번째. 왜 니콜라는 자차나 대중교통이 아닌 300km가 넘는 먼 거리를 걸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가난’이다. 니콜라의 아내는 남편이 2년간 봉급이 밀리고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자 돈을 내놓으라며 남편의 회사를 찾아간다. 남편이 받지 못한 돈을 아내는 받기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그들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 불가능하다 여긴 사회복지과장은 안정적인 삶을 위해 니콜라에게 정규직 자리를 얻으라 한다. 돈이 없는 니콜라는 두 발에 피가 날 만큼 걸어가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니콜라는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 중에는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먹을 것을 주며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니콜라에게 잔혹한 현실을 인지시켜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니콜라의 친구이다. 길에서 니콜라를 발견한 친구는 그를 태워 준다. 친구가 하는 일은 불법 이주노동자들을 운반하는 것이다. 길 한 가운데에 이주노동자들을 내린 친구는 매몰차게 알아서 갈 길을 가라며 그들을 내쫓는다.
친구 역시 니콜라와 같은 빈곤한 처지에 있다. 직장에서는 해고를 당했고, 집에는 돌봐야 하는 가족들이 있다.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해야만 한다. 친구는 니콜라의 행동이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베오그라드의 부유한 사람들이 니콜라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리가 만무하다는 걸 강조하며 자신과 동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돈을 벌어 아이들을 데려오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마을에서 출발할 때부터 장관을 만나러 간다는 걸 말했던 니콜라는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순간부터 유명인이 된다. 언론은 앞 다투어 니콜라를 인터뷰하며 그의 억울한 사연을 조명한다. 이런 언론의 관심에 부담을 느낀 장관은 니콜라를 만나 직접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라 말한다. 이 한 마디에 기대를 품은 니콜라는 다시 아이들을 만날 것이란 확신을 지니고 마을로 돌아온다.
니콜라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동시에 순진하다. 열심히 일만 하면 다 잘 될 것이라 여기는 그의 희망은 베오그라드를 향한 여정에도 담겨 있다. 직접 찾아오는 정성을 보이면 장관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 여겼다. 허나 장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권고에 불과하다. 강제로 사건을 해결할 권한이 없고, 압력을 넣을 생각도 없다. 딸랑 권고문 하나를 받아온 니콜라는 그 종이가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장관도 언론도 그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온 니콜라가 마주한 건 잔혹한 현실이다. 아내는 병원에서 여전히 치료를 받고 있고, 아이들은 니콜라가 자신들을 버렸다 오해한다. 그가 떠났다 여긴 마을 사람들은 집안 전자가구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 모습은 <기생충>이 보여줬던 현대사회 빈민층의 삶을 연상시킨다. 열심히 살아도 돈을 벌지 못하고, 가난하기에 자식을 키울 권리마저 빼앗긴다. 성실하게 노력하면 기적 같은 행운이 생긴다는 믿음마저 이 영화는 배반한다.
그럼에도 니콜라가 일어서야 하는 건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대의 아버지들을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에 비유한다. 시지프스는 신을 기만한 벌로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 떨어뜨리는 벌을 받았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영겁의 형벌은 대물림 되는 가난을 의미한다. 니콜라와 같은 아버지들은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일터로 향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은 고난과 역경 끝에 스스로 일어서는 니콜라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다만 이 표현이 드라마틱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결국 니콜라는 다시 일상을 시작해야 하며 가족을 되찾기 위해 기약 없는 내일을 보내야 한다. 그는 이웃집들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가져간 물건을 다시 집에 되돌린다. 텅 빈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은 모든 걸 잃었으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비애를 보여준다. 기적 같은 이야기를 통한 감동을 원했다면 다소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허나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빈곤과 계층의 굴레에 갇혀 고통을 받는 현대인의 필연적인 아둔함을 조명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이란 길을 비추며 감정적인 격화를 이끌어 낸다. 9월 30일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