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에게는 자신의 얼굴로 삼는 배우가 있다. 감독의 얼굴이 되어주는 이 배우를 우리는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에게는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두 배우가 있다. 바로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다. <패러렐 마더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페넬로페 크루즈의 세월이 역사와 연대의 이름으로 담긴 영화다.
세월이란 코드는 스페인 내전이란 아픈 역사와 통속극을 연결지어 표현한다. 사진작가인 야니스는 모계로 이뤄진 가정에서 살아왔다. 그녀는 내전 당시 학살의 피해자였던 증조부의 유해를 찾기 위해 교수 아르투로와 만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임신한 야니스는 홀로 아이를 키우기로 한다. 역사의 아픔이 반복되듯 남성 없이 아이를 길러왔던 야니스 가정의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이다.
야니스의 집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해 여성들의 사진이 주로 걸려 있다. 이는 작품이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릴 것이란 걸 암시한다. 이는 ‘패러렐(Parallel, 평행)’이란 영화의 제목과도 연결이 된다. 모든 여성이자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아픈 역사는 아이가 바뀌는 통속극으로 나타난다. 야니스는 병원에서 아나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방을 쓰는데 이때 아이가 바뀌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야니스는 아나가 데려간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실을 숨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통속극의 요소를 역사를 통해 부정한 것이라 꼬집는다.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과거의 정권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야니스의 모습과 연결된다. 조부모의 시체라는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할머니의 뒤를 이은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진다. 이를 해결하는 코드가 연대다.
연대란 코드는 여성과 가족 그리고 어머니로 연결이 된다. 야니스와 아나 사이에는 ‘평행이론’이라 할 만큼 공통된 특징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원치 않은 순간에 임신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가족의 부재라는 현상을 겪는다. 야니스가 보모로 아나를 집에 들인다는 점은 그녀가 딸 세실리아의 친모라는 점과 함께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연대가 작용한다. 때문에 두 사람은 빠르게 사랑에 빠진다.
다만 이 연대는 기존 여성영화와는 다른 형태를 지닌다. 기존의 여성영화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보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역시 이전 작품인 <귀향>에서는 모계가정을 중심으로 이런 경향을 강조한 바 있다. 반면 이번 작품은 각자의 주체성에 초점을 둔다. 야니스도, 아나도 세실리아를 통해 서로 연대를 이루지만 두 사람이 함께 서로를 치유하기 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안식을 얻는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을 연대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스타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연대를 통한 주체성의 확립이 아닌 존재 자체가 지닌 주체성에 주목한다. 이 코드는 다시 역사와 귀결이 된다. 미시사의 역사에서는 개개인의 삶이 역사를 이루는 흔적이다. 야니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조상의 시체를 발견하는 과정은 이런 흔적 속에서 주체성을 강조하는 미덕이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극적인 안정감 역시 가져온다.
<패러렐 마더스>의 흥미로운 점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 페넬로페 크루즈가 보여준 얼굴의 변화다. 이 작품을 보면 감독의 두 영화가 떠오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귀향>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주인공 마누엘라는 한때 잘 나가던 연극배우였지만 임신으로 꿈을 포기한다. 이 마누엘라의 캐릭터는 <패러렐 마더스>에서 아나의 어머니이자 뒤늦게 주연배우가 된 테레사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에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임신한 수녀 로사로 출연한다. 강한 모성을 지닌 로사는 마누엘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명의 위험 속에서 아기를 출산하고자 한다. 테레사와 야니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마치 마누엘라가 더 성숙해진 로사를 만난 듯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제목 그대로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찬사였다는 점에서 <패러렐 마더스>의 주제의식은 그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귀향>에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끄는 라이문다 역을 맡았다. 라이문다는 살인사건을 통해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죽은 줄 알았던 엄마를 다시 만나며 모계가정을 이룬다.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라이문다의 대사는 여성 사이의 강한 연대와 사랑을 보여준다. 엄마를 다시 만나며 삶을 지탱할 기둥을 얻은 라이문다와 달리 야니스는 스스로 모든 걸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페넬로페 크루즈의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패러렐 마더스>는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찬사를 보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헌신과 열정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유려한 스토리텔링은 물론 특유의 밝은 색감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을 통해 영화적인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스페인의 아픈 과거를 두 여성의 이야기로 담아내며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제목 그대로 시대는 다르지만 평행의 삶을 살아온 모든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