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는 아나 디 아르마스가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NC-17 등급으로 넷플릭스에서 가장 높은 수위를 보여줄 것이란 점과 아나 디 아르마스가 높은 싱크로율의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담아내며 9월 최고의 화제작으로 언급되었다.
시사회부터 좋지 않았던 작품은 넷플릭스 공개 이후 최악의 여론에 직면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역사왜곡과 고인모독이다. 역사왜곡 논란에 시달린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적인 문제가 있는 캐릭터를 미화했다는 논란에 시달려 왔다. 헌데 <블론드>는 반대다. 고인모독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마릴린 먼로를 부정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블론드>의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영화가 공개되기 전 인터뷰에서 ‘다들 마릴린 먼로의 NC-17 등급 영화를 원하지 않았나?’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이 발언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극중 마릴린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어머니로 인해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마릴린의 심리는 극에서 전반적으로 그녀가 느끼는 불안한 심리의 원천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주력하는 건 그녀의 남자들이다. 성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는데 오디션에서의 강간 장면, 쓰리썸 장면, 구강성교 장면 등 자극적인 장면들이 가득하다. 마릴린은 불안한 심리로 인해 주변의 말에 흔들리고 정신적으로 무너지며 남성을 통해 안정을 느끼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릴린은 남편들을 ‘Daddy’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심리표현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남녀 관계에서 ‘Daddy’는 ‘주인님’이란 의미도 된다. 정신적으로 우울하며 의존적인 심리를 지닌 주인공을 내세운 포르노 영화에 마릴린 먼로를 내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역사왜곡에 가깝다.
쓰리썸 장면의 주인공인 찰스 채플린 주니어의 경우 자신의 회고록에서 직접 먼로와는 지인 사이였고 더 발전하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릴린은 낙태를 하고 죽은 아기가 등장하며 고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반복되는 유산을 겪으며 심적으로 괴로워했다.
이 작품이 시도한 역사왜곡과 고인모독은 당시 매스컴이 마릴린을 다루었던 방식과 같다. 금발로 상징되는 섹스 심볼인 무식한 남성, 남성들의 뜻에 따라 흔들리는 무기력한 여성으로 그리는데 주력한다. 포르노적인 자극을 더 강하게 이끌어내기 위해 남성 판타지 속 순종적인 캐릭터로 소모시킨다.
마릴린 먼로는 굉장히 똑똑하고 진취적이었던 인물로 회자된다. 대중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정확히 알고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 흑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인종차별에 반대했고, 할리우드 남성 제작자들과 감독들의 괴롭힘을 비판했으며, 여배우 최초로 독립적인 프로모션을 설립했다.
당시 매스컴은 마릴린 먼로를 그저 백치미 가득한 똑똑하지 않은 여성으로 여기고 싶어했는데, <블론드>는 이 시대역행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후세대 마릴린 먼로를 소재로 삼은 예술작품들은 할리우드가 박제하고자 했던 금발의 백치미 여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 아름다웠던 그녀를 보여주고자 노력해 왔다. 대표적인 영화로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블론드>에게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다. 이 영화는 전기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이다. 넷플릭스 페이지의 영화소개란에도 픽션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그녀와 관련된 온갖 찌라시를 가져와 만든 픽션일 뿐이란 점을 내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마릴린 먼로를 모르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녀를 끔찍한 방법으로 인식시켰다는 점이 주는 슬픔이다. 마릴린 먼로의 경우 명예훼손을 주장할 유족도 없기에 창작에 있어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제작진과 아나 디 아르마스는 마릴린 먼로의 묘지에 메시지 카드를 들고 가서 영화 촬영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고 말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시도나 인물의 심리를 관음증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예술적인 정취를 자아낼 수 있다고 보지만 극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잡스>처럼 형식적인 면에서의 파격도, <스펜서>처럼 인물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기회를 확장하지도 못한다. <주디>처럼 공감과 위로를 보내는 인상적인 시도도 아니란 점에서 애매하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이 보여준 심도 높은 연출은 인상적이나 우울하고 무거운 극의 분위기와 관음증적인 시선이 좋은 합을 선보이지 못한다. 무엇보다 3시간 가까운 런닝타임 동안 마릴린 먼로의 심리를 단순하게 그리다 보니 분위기만 무겁고 인물에 빠질 수 있는 동력은 부족하다.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지나치게 무겁고 우울한 포르노 영화에 머무르며 연말 오스카를 기대했던 넷플릭스의 기대 하나를 지우는 수준에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