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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얼굴 앞에서] 오늘 하루치의 감사함을 발견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초연함이 담겨 있다. 꽃 한 송이, 시원한 바람,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마저도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만 싶다.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영화인 <당신얼굴 앞에서>는 밝은 톤으로 감싸 포근히 감싸 안는다. 마치 요즘같이 쌀쌀한 날씨 빠져나가기 힘든 이불 속 같다. 홍상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다. 풍자와 철학, 시니컬한 면을 다룬 전작과는 조금 다르다. 죽음을 소재로 하지만 어쩐지 따스하다.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여서 인지,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진달까. 주인공의 절망적인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삶을 예찬하고 있다.

오래전 미국으로 떠난 상옥(이혜영)은 최근 한국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동생과 재회하기도 했고, 한 중견 감독을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상옥은 요즘 하나뿐인 동생 정옥(조윤희)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둘은 자매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언니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미국에서 잘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대화를 하면 할 수록 새로운 발견이 계속된다.

상옥도 동생을 잘 모른다. 어쩌다 이 집을 분양받아 살게 된 건지, 조카 승원(신석호)이 떡볶이 장사로 먹고살고 있는지, 근황을 알지 못했다. 차차 알아가면 된다고 다독였지만 그것 때문에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동생은 말도 없이 떠나버리면 어떡하냐고,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고 화가 잔뜩 났다. 그만큼 가족을 그리워했던가, 어쨌거나 드디어 만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게 이렇게 값진 일인지 처음 알았다. 오늘 하루가 부단히 소중하다.

느긋하게 자고 나서 브런치 먹으러 근처 빵집을 찾아갔다. 정말 맛있는 음식에 감사하고 가까운 미래도 그려본다. 그러고 나서 공원도 산책하고 사진도 찍으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 보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쉬운 오늘이 속절없이 저물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천천히 일상 하나하나를 누리고 싶지만 상옥에게는 시간이 없다. 상옥은 사실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부터 많은 것을 숨기고 들어왔다. 오전부터 시작된 빵집 투어와 신축 아파트 구경, 조카의 가게를 둘러보고 예전 살던 집을 찾아 과거를 추억했다. 유년 시절에 살던 집은 다행히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기분이다. 어릴 때 잠깐 연기했던 게 다인 잊힌 배우. 한국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공원에서 알아봐 주는 행인이 있었다.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오후에는 한 영화감독(권해효)과 어렵게 보기로 약속했다. 귀국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던 건지 영화 출연 제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계속되는 구애에 마지 못해 만나는 거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말이 잘 통한다. 숏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젊었던 내 모습을 기억해 주고 있다. 술을 진탕 마셨고 비가 오니 괜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사랑의 인사’를 어설픈 기타로 연주하기도 했다. 장편 영화를 거절하고 단편 영화는 승낙했다. 도망치듯 떠난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죽음을 생각하니 삶이 가까워 지더라

홍상수 감독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후 죽음을 자주 논한다. 이번에는 아예 시한부 설정으로 종교적이기까지 한 삶의 감사를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상옥은 세속적인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이를 모르는 동생이 아파트값이 올랐다며 언니도 한 채 사서 정착하라고 말할 때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달관한 상옥의 기운은 영화의 가장 큰 인장이다

이후 조카의 떡볶이 가게에 갔다가 국물을 옷에 흘렸을 때도 갈아입을 생각을 잠시 했을 뿐, 다음 약속 장소로 직진했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술집에서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에서도 엿보인다. 당장 내일이라도 영화를 찍자고 말하던 감독은 그 말이 곧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공지한다. 상옥은 그 앞에서도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기고 웃고 말뿐이다. 욕망 없는 인간의 텅 빈 슬픔과 인생의 마무리는 동시에 보여준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중한 일상이 모여 만들어 간다. 이를 자주 잊고 살아가는 아둔한 인간에게 홍상수 감독은 자꾸만 잊지 말라며 환기한다. 예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을 수 없이 반복하면서 말이다. 상옥은 고백한다. 열일곱에 자살을 생각한 적 있었다고, 그때의 감정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다시 상기했노라며 말이다. 그때 서울역 앞에 서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더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졌노라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뭔지 가슴으로 알 수 있던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며 놓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때문에 죽음 앞에서 피하지 않고 정면에 서서 맞이하겠다 선언한다.

오랜만에 등장한 이혜영 배우는 시한부 연기마저도 카리스마 가득하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배우와의 호흡도 조화롭다. 김민희가 없는 홍상수 영화지만 공기처럼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법한 분위기가 감돈다. 여성이 주체와 객체가 되어 바라보는 시각의 유연함이 살아 있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이 나이 듦에 따라 세상과 마주하게 될 용기와 포부일지 모른다. 쓸쓸하고 서글프지만 추하지만은 않다. 세상에 태어나 늙어가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이는 해탈이 깔려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존재임을 직시하라고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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