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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의 김민영> 자취방에 초대해놓고 정작 도망간 친구에게

누구나 19살과 20살을 통과하게 된다. 수능 D-100일. 100일 동안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면 그다음은 좀 행복할까. 그때는 수능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민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고, 이것만 넘기면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때, 같이 야식 먹으면서 이 살은 다 대학 가서 빠진다고 자위했던 때가 생각났다. 막연한 불안과 기대는 지금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96분 동안 키득거리다 보니 그때가 그리워졌다. 오랜만에 옛날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같이 웃고 떠들고 울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19살과 20살의 나는 어땠을까, 그때 어울리던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는 사는 게 바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을 친구들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자취방에 초대해놓고 정작 도망간 친구

성적표이 김민영

청주에서 기숙사 생활 중인 고등학교 3학년인 김민영(윤아정), 유정희(김주아), 최수산나(손다현)는 삼행시 클럽의 멤버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 모를 삼행시지만 진지하게 클럽을 유지했고, 수능 100일을 앞두고 비장한 해체식을 했다. 졸업 후 각자 다른 생활을 하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대구대에 진학한 김민영, 하버드에 진학한 최수산나, 유정희는 재수하지 않고 테니스클럽 알바를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떨어지자 영원할 것 같았던 사이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방학을 맞아 서울 오빠 집으로 놀러 오란 민영의 부름에 정희는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갔다. 준비물에는 햇반, 보드게임, 참외 등이 있었다. 공부하느라 잠시 멈추었던 ‘재미있게 놀기’ 리스트에 있는 것들이었다. 고작 반년 정도 떨어졌을 뿐인데 민영은 많이 변했고 정희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성적표에 불만을 품고 조금이라도 올려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민영의 태도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희도 이 일에 동참했다. 빨리 해결해야 놀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민영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안중에도 없고 성적 고민으로 꽉 차 있었다.

빨리 놀고 싶은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사람 불러 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행동에 참다못한 정희는 폭발한다. 좋아하는 시트콤 이야기에 빗대 은근히 서운함을 표현해 봤지만, 민영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학교로 돌아갔다. 주인 없는 자취방에서 최악의 하루를 보내게 된 정희는 우연히 민영의 일기장을 찾게 된다. 그 안에는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참신하고 통통 튀는 매력 덩어리

성적표의 김민영

<성적표의 김민영>은 이재은, 임지선 두 감독의 데뷔작이다. 두 사람은 한 영화 워크숍에서 만났다. 영화는 2017년에 정희가 민영의 집에서 서운함을 느낀다는 짧은 단편에 자유롭게 살을 붙이고 덧댄 결과물이다. 실제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교차하던 이재은 감독의 경험을 살렸다고 한다.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감성, 무엇을 하든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 찼던 때를 담았다. 여름 방학 동안 영화를 찍겠다는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고교 친구들이 주인공인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와도 닮았다. 돈, 스펙, 인맥 등에 연연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 미쳐 있던 때 말이다. 그래서일까. 테니스 공, 민영의 형광색 옷, 숲 등 초록의 여름 색이 가득 담겨있다.

<보희와 녹양>에서 당찬 녹양을 연기한 김주아 배우는 촬영 당시 16세였다. 중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진중함으로 정희를 그려냈다. 스스로 말을 덜어내며 내성적이고 엉뚱한 정희를 연기했다. 데뷔작인 윤아정 배우는 18살이었던 사춘기 감정을 살려 냉소적인 민영을 표현했다. 완벽한 외강내유형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다. 두 배우의 발랄함과 두 감독의 자유분방하고 신선한 연출법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사랑스러운 버디 무비를 완성했다.

무엇보다 참신한 연출이 장점이다. 20년 전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틀어 놓는 장면이 연이어 등장하고, 이 느낌을 살려 시트콤 형식을 빌려 액자식 설정을 넣었다. 일면식도 없는 정희, 민영, 수산나, 정일이 제주도로 여행 가는 장면은 불쑥 튀어 오르지만 퍽 귀엽고 재미있다.

미묘한 관계를 포착한 섬세함

성적표의 김민영

영화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상대방을 향한 기대와 섭섭함, 외로움을 느껴 봤다면 공감 가는 요소가 많을 거다. 정희와 민영은 가식, 형식, 불안, 두려움, 바쁜 일상,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는 한국인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어렴풋이 내 모습을 발견하는 공감 혹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를 잘 포착했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게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때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나를 더 많이 신경 쓰는 피곤한 한국인의 삶. 친한 친구, 가족에게 나는 몇 점짜리 사람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제목 때문에 민영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했다가 정희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에 꼭 있을 법한 4차원 캐릭터 정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외로움을 안고 있는 친구다. 남들 다 하는 걱정은 요만큼도 없어 보이는 천진난만함과 4차원 기질로 똘똘 뭉쳐 있다. 회복 탄성력이 강한 아이다. 세태에 휩쓸리지 않는 뚝심이 있다. 학교와 가정을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데 필요한 연료를 단단히 채우고 있다.

그렇다고 게으른 건 절대 아니다.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다만 상상력이 풍부해,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비켜 자신만의 페이스로 뚜벅뚜벅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성적표의 김민영’이란 제목은 정희가 민영을 생각하는 마음의 방향이다. 김민영이란 한 사람을 정의하고자 할 때, 그저 성적표로 도출할 수 없는 소중한 방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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