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와 전개를 떠나 오롯이 배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영화가 있다. 94분 중 30여 분을 극장 의자에 앉자 몸을 배배 꼬면서 보게 만들었던 <발신제한>은 오랜 조연 생활 끝에 단독 주연을 맡은 조우진의 하드캐리가 인상적인 영화다. 인트로부터 시작하는 긴장감 넘치는 효과음은 오랜 친구처럼 찰싹 달라붙어 적재적소에 쓰여 끝까지 함께 한다.
조우진의 독주를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은 뒷좌석에 타고 있는 아역 배우 둘이다. 아픈 동생을 진정시키고 아빠의 전화 통화를 유심히 듣는 딸 혜인(이재인)의 침착함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아들의 공포에 질린 절규는 보는 사람조차 매우 안타깝게 만든다.
“돈을 준비해,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영화 <발신제한>은 아침 등굣길에 아이들을 차에 태운 은행 센터장 성규(조우진)가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겪게 되는 도심 추격 스릴러다.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에 귀를 찌르듯이 울리는 낯선 전화벨에 이끌린 성규는 차에 유압식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되지만 보이스피싱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다. 하지만 곧 회사 동료의 차가 폭발하는 현장을 목격한 후 패닉에 빠지며 순식간에 테러 용의자로 전락하게 된 성규는 전화기 속 남성의 목소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전화기 속 남자는 내리면 터진다는 경고와 함께 거액의 돈을 준비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계속해서 이어간다. 성규는 돈을 구하기 위해 VVIP 고객에게 거짓말과 웃음으로 돈을 빼돌린 후 끊을 수 없는 통화를 계속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부상을 당해 치료가 시급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지만, 멈출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아비규환 속으로 직진할 수밖에 없다.
<발신제한>은 <더 테러 라이브>를 떠올리게 만드는 의문의 전화 목소리에 따라 주인공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차에 갇힌 성규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지만 동승한 아이들의 시점, 접촉하는 외부인(경찰)의 세 시점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가족, 경찰 및 폭발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각화된 심리가 투영되어 몰입감을 부여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가족을 지키고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우리네 가장의 얼굴과 겹쳐진다. 일에 바빠 정작 가족과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피해자였지만 누군가에는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도심 한복판에 시한폭탄을 끌고 다니는 테러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의 인생이 좋은 사람일 수만은 없다는 복잡한 내면을 성규라는 캐릭터에 투영해 다잡은 흔적이 엿보인다. 영화가 끝나면 밀려오는 씁쓸함에서 오늘 나의 행복은 어쩌면 누군가의 불행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부정하게 받은 행운은 돌고 돌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인과응보 사필귀정 메시지도 상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원맨쇼의 묘미
<발신제한>은 원톱 주연의 가능성을 발견한 영화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인과 악인 사이를 넘나드는 캐릭터는 오롯이 조우진의 버라이어티 원맨쇼가 있어 가능했다. 23년 차 연기 경력 중 16년의 무명 생활을 연극 무대와 단역으로 탄탄하게 쌓아 올린 조우진은 <내부자들>(2015)의 조 상무역으로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 후, 다수의 배우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연기 벌레, 연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충무로의 명품 조연으로 성장해 왔다.
이처럼 조우진은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모두를 집중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중도 이탈자 없이 끝까지 이끌어 간다. 영화의 장르가 곧 조우진이 된 사례, 발군의 리더십이었다. 딸 혜인을 맡은 이재인과 완벽한 부녀 케미를 이루며 감동까지 이끌어 낸다.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베이스로 두고, 제한된 공간, 의문의 전화,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이라는 클리셰 조미료를 적절히 가미해 관객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쫄깃한 맛을 선사한다. 익숙한 맛을 연상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점에서도 손맛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는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시그니처 음식 같다.
다만 94분의 쾌속 질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전반 30여 분은 분노의 질주를 연상케 하는 도심 속 카 체이싱과 압박감이 이어지나, 전화 목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는 안전 운전으로 가다서다를 반복하다 이내 서행한다.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2016)을 원작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