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서 <벌룬>과 마주하는 건 특별하다. 열기구로 베를린 장벽을 넘어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던 한 가족의 도전. 현재의 독일은 이를 ‘영화보다 극적인 실화’라고 신화처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휴전선이 그인 우리에겐 지금도 가능한 이이기 중 하나일 수 있다. 어쩌면 이보다 살벌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완료된 일 앞에서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상기해야만 하는 것. 그게 <벌룬> 앞에선 한국 관객의 기이한 위치다.
열기구 탈출을 시도했던 피터(프리드리히 머크) 가족의 추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후에 있었던 또 한 번의 도전을 담는다. 한 번의 추락으로 피터 가족의 비행 실패 정황은 정부에 발각되고, 그들이 경찰에 쫓기는 상황이 교차로 펼쳐진다. 이렇게 <벌룬>은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개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가의 대립을 중심에 뒀다. 이들의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오는 스릴이 있고, 일부 장면은 스파이 장르처럼 연출되어 몰입도가 상당하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실화 자체의 힘을 가장 잘 살리는 방향을 선택했으며, 상업 영화로서 시도할 법했던 과장과 기교를 자제했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를 향한 시선이 눈에 띈다.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벌룬>은 베를린 장벽 설치의 원인이 된 사상의 대립을 전면에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관심이 없다. <벌룬>은 하나의 사상을 우위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당시 사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과 베를린 장벽에 막혀 억압당했던 독일인들의 심리와 딜레마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상에 관해 말하지는 않지만, 사상이 많든 감시 체계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벌룬>에서 이데올로기는 판옵티콘처럼 작동하며 모두를 내려다본다. 정부는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국민들은 서로의 사상을 감시한다. 이 때문에 모두가 불안함에 떨어야 하고, 동시에 서로의 이웃을 경계해야만 했다. 냉전이 준 깊은 상처 중 하나는 이웃을 의심하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공동체의 붕괴에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도 한국 관객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느껴야만 했다. 블랙리스트 논란이 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냉전 속에 살아가고 있는 분단국가의 시민이고, 그래서 <벌룬>이 극적으로 묘사한 장면들에 거리감을 두게 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