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무엇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고, 철학적인 사유와 윤리를 지키며 문명을 이룩했다는 점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차이점을 쉽게 찾아내기 힘들었다. 도축장을 도망쳐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물소 한 마리와 이를 잡겠다고 성난 마을 사람들의 광기를 쏟아낸다. 그 무엇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인지 쉽게 인지할 수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폭주하는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 광란의 이전투구를 쉼 없이 목격했다.
<잘리카투>는 남인도의 한마을에서 벌어진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각자의 삶으로 바쁜 마을 사람들에게 푸줏간은 활력의 장소다. 고요하고 싶은 산속에 자리 잡은 마을은 오늘도 분주하다. 조금 있으면 시작될 결혼식을 성대하게 만들어 줄 고기를 주문했지만 물소가 도망가 버려 난감해진 집을 비롯해 고기를 원하는 집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고기를 먹지 못해 화가 난 사람들의 부작용은 후반부로 갈수록 치열해지다 장례식까지 이어진다. 관혼상제에 소가 없으니 미치고 뛸 일이다.
쉽게 잡힐 줄 알았던 물소는 신출귀몰 나타나 마을을 헤집고 다니고 이제는 그 명분마저 희미해져 ‘왜’ 인지도 잊게 된다. 결국 물소를 잡기 위해 마을 남자들과 이웃 남자들까지 가세해 아수라장이 된다. 물소를 쫓는 와중에 서로 사이가 틀어져 분노를 더욱 쌓여만 가고. 결국 내일 동틀 때까지 도살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던 중 우물에 빠진 물소를 서로 잡겠다며 아우성을 벌이다 사고로 이어진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다 된 밥에 코 빠트리게 된 상황이 벌어지지만 물소는 유유히 탈출해 버린다.
제목 ‘잘리카투’는 인도 남부의 수확 축제 기간에 남성들이 풀어 놓은 황소를 제압하는 경기를 뜻한다. 영화 속에서 잘리카투가 열리지 않지만 흡사 그 경기를 보는 듯한 펄떡임이 내내 지배하고 있다. 소를 잡으려는 각양각색 인간 군상의 총집합, 날카로운 비판이 섞여 있다.
‘S 하리쉬’의 단편 소설 《마오주의자》(Maoist)를 원작으로 각색한 영화는 인간의 식을 줄 모르는 욕망을 시청각적 자극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전반부는 삶의 리듬과 비트가 느껴지는 흥겨운 박자로 분위기를 띄우다가 물소와의 사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신들린 듯 강렬한 영상미와 음향으로 사로잡는다. 그동안 생각했던 눈과 귀가 흥겨운 발리우드의 스타일은 찾아볼 수 없다.
지역색이 뚜렷한 배경은 현지에서 직접 마을 거주민들의 생활을 탐구한 감독 ‘리조 조세 펠리세리’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대자연의 광활함과 공포, 종교적인 의식은 샤머니즘을 부각하며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가장 큰 특이점은 마초이즘이 폭발하는 원초적 분노다. 처음에는 소를 잡겠다고 나서던 사람들이 목적을 잃고 우왕좌왕 휩쓸리는 모습과 늘어나는 군중이 여느 공포영화보다도 무섭게 다가온다. 탈주한 짐승 하나 때문에 모두가 짐승이 되어버린 아이러니가 멈출 줄 모르는 광기를 향한 질타를 대변한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효과음과 빠른 음악의 충격과 핸드헬드 카메라의 현장감은 이 상황을 더욱 몰아붙인다. 헐떡거리는 물소와 울부짖는 여러 동물의 소리를 섞어 탄생했다. 곤충, 새, 물소리 등 흔히 밤늦게 산속에서 들릴법한 신비로움이 가득 담겨있다.
영화는 서로 자기 잘못만 따지다가 터지는 폭력성이 주체할 수 없이 커지며 짐승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이 방점을 찍는다. 이를 시종일관 쫓는 관음의 카메라는 인간의 야만성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하다. 오프닝과 클로징에 등장하는 요한계시록은 묵직한 울림을 함께한다. 이와 함께 원시인의 벽화 속 모습이 재현되는 장면은 이성, 목적, 신앙을 잃어버린 인류, 그중에서도 노골적인 남성성의 풍자가 강하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