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 11일 보스니아. 아이다(야스나 디우리치치)는 스레브레니차의 마을에 주둔한 유엔(평화유지군)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일촉즉발 상황임을 짐작하지만 아이다는 통역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을에 세르비아 군대가 들이닥칠 위기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유엔 입장에서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유엔은 이 상황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지지부진한 입장으로 애초부터 막으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다. 그 사이 세르비아계 군대가 마을을 불법 점령했고 사람들은 유엔 캠프로 몰려들었다. 그 혼란의 도가니 속 신분을 이용해 가족을 유엔 쪽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상황은 끝이 아니었다. 산 넘으면 산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세르비아 군대는 유엔 캠프로 찾아와 긴장을 유발한다. 사람들을 위협하며 민간인을 이송하려는 음모를 알게 되지만 이는 개인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민간인을 안전한 곳을 보내주겠다는 미끼로 분리하고 남성만 차출해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아이다는 그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키고자 분투한다. 가족 중에는 아이다만 빼고 남편과 아들 둘 다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던 유엔은 가까스로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보급품도 끊긴 채 손발이 묶인 유엔은 무기력하게 스레브레니차를 버리게 된다. 유엔의 외교정책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다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통역사의 대의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개인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지금까지 3년을 버텼는데 지금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가족을 다독이면서도 동료나 상사에게는 몰래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해야 한다. 아이다의 직업이 통역사인 것은 최고의 아이러니다. 눈치로 보아하니 심각한 상황을 짐작하지만 이를 그대로 말하지 못한다. “안전하니 안심하고 기다리라”라는 거짓말을 전하는 앵무새가 되어 괴롭다.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서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이다는 감독의 전령이 되어 유엔 구석구석을 훑는다. 유엔과 보스니아 양쪽에 발을 담그고 있는 캠프뿐만 아니라 유엔 본부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통역이 필요할 때는 높은 곳에 올라 사람들을 호령하며 전체적인 상황을 지켜본다. 마치 캠프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는 철창을 수시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분이자 영화를 이끌어가는 리더로 활약한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보스니아 내전 중 가장 참혹했던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을 극화했다. <그르바비차>로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야스밀라 즈바니치’감독의 신작이다. 제77회 베니스영화제 공개 후 아카데미 국제장편 영화상 후보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유럽 사이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슬픈 역사다. 종교, 정치, 민족, 군사, 지정학적으로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로 이해하는 것도 복잡한 상황이다. 1992년-95년까지 3년 동안 이어진 보스니아 분쟁 중 민간인 8,000여 명을 계획적으로 학살했으며 국가적인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이 참사는 대부분이 남성이었으며 그중에는 10대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 된다.
유럽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보스니아의 스레브레니차는 빈에서 비행기로 40분 거리, 베를린에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유럽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코앞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눈감아 버렸다. 3년간 일어난 전쟁을 단 104분으로 압축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유발되는 긴장감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의 한순간을 짚어나가며 비극의 한 가운데로 아이다와 함께 이끌린다. 제목 ‘쿠오바디스’는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할 때 로마를 떠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한 말이다. 과연 그들이 섬기는 신은 어디를 보고 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