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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타임> 12살 인생이 폭망했다

대부분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나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기억은 왜곡되고 사라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 저랬냐’라는 주변의 물음이 이어진다. 쉬운 것 같아도 자전적인 서사는 양날의 검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도시 Z>, <애드 아스트라>를 통해 이름을 알린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자전적 서사를 바탕으로 꾸린 영화다. 초기에는 범죄물을 중심으로 찍었고 칸영화제와 인연이 많은 감독은 ‘미지의 세계 탐구’와 ‘가족’이란 소재로 연결된 두 영화 이후 내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메리칸드림’을 쫓는 가족 서사는 익숙한 구도에 진심을 더하기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우크라이나 유대인 출신 조부모가 무일푼으로 뉴욕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렸다. 배관공의 아들로 자라 보일러 수리공인 아버지는 자식에게 더 나은 환경을 선물하고 싶어 고군분투한다. 가장 사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통한다. <아마겟돈 타임>은 1980년대 뉴욕 퀸즈를 바탕으로 개인의 역사가 보편적인 감정으로 탈바꿈하는 따스한 마법이다. 그 시대와 장소에 있지 않았지만 마치 경험한 것 같은 생생함, 일기장을 훔쳐본 듯 은밀함이 전해진다.

부조리에 점차 익숙해지는 나이

새 학년이 된 첫날 12살 폴(뱅크스 레페타)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죠니(제일린 웹)와 친구가 된 후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지만 선생님과 부모님은 폴의 말을 무시하기 일쑤다.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할아버지 (안소니 홉킨스)와 죠니였다. 어른들은 흑인 죠니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다. 사회적 차별에 맞서고, 꿈이 있다는 건 멋진 거라며 예술적 기질도 칭찬해 준다. 친구 같은 할아버지가 있어 폴은 권위적인 가정 분위기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육을 불신하던 엄마(앤 해서웨이)와 아빠(제레미 스트롱)의 결정으로 폴은 사립학교로 전학 가 죠니와 멀어진다. 어떻게든 학교생활에 적응하려 했지만 엄격한 규율과 학업량을 따라가지 못했고, 간간이 죠니와 만나며 숨통을 트게 된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폴은 세상 모두를 잃은 듯 흔들린다.

한편, 죠니는 폴이 떠나자 더 힘들어진다. 아픈 할머니와 더 이상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자 거리를 떠돌다 폴의 아지트에서 머물게 된다. 추워지는 날씨가 걱정이지만 죠니와의 우정을 허락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서 재울 수 없어 답답한 폴. 결국, 플로리다에 도착해 과학자가 되겠다는 죠니와 떠나기 위해 학교 컴퓨터를 훔쳐 팔려다 경찰에 발각된다. 그러나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범죄자로 몰린 된 죠니를 보며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불합리를 깨달아 간다.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부조리한 세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느껴지는 성장 영화

영화는 대부분 감독이 실제 겪은 기억을 되살려 투영했다. 특히 죠니와의 관계는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연상될 정도로 인류애가 가득하다. 피부 색깔과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여긴 허크(허클베리 핀)가 흑인 노예 짐을 도와주고 구하기까지 하는 소설은 우정을 넘어 존엄성을 일깨워 준다. <아마겟돈 타임> 또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과 어른들의 위선, 성장을 다루고 있어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년은 세상이란 알을 깨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고 드디어 밖으로 나와 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알은 작은 세계였을 뿐 그 밖은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꺼내 떠올려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친구 같은 할아버지 든든한 장인어른, 멋지고 다정한 아빠였던 가족의 우산이 되어준 진정한 어른. 마냥 커 보이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점차 노쇠해지면서 작아지는 모습은 안소니 홉킨스의 자연스러운 외모와 말투, 행동으로 충분히 전달된다.

할아버지는 폴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식처 그 이상이다. 부당함에 호소할 줄 알고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계속 싸우라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다. 꿈과 현실은 아득하니 다르고 인생은 불공평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고 일러준 할아버지.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 주고, 유대인 출신 이민자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할지도 가르쳐 준다. 자상한 할아버지를 통해 관객과 폴은 앞을 향해 걸어 나가고 쓰려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추워지는 날씨 탓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계절이다. 건조한 마음에 촉촉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을 데우고 싶다면 <아마겟돈 타임>을 추천한다. 올해 개봉한 <벨파스트>, <리코리쉬 피자>를 즐겼다면 충분히 빠져들 수 있겠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크다. 유행하고 있는 레트로 감성과 두 아역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도와주는 명배우의 노련한 연기가 포인트다.

또 하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전 포인트는 80년대 뉴욕을 완벽히 재현한 것도 있지만. 폴이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해 트럼프의 누나 메리 엔 트럼프의 연설을 듣는 장면이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씬스틸러로 활약했다. 제목 ‘아마겟돈 타임’은 가족의 세계가 무너져 내린 사건(할아버지의 죽음)과 당시 핵 전쟁의 공포 때문에 벌어졌던 불안함의 상징이다. 동명의 노래 가사가 영화를 대변하는 듯 잔잔하게 흘러나와 향수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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