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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도려내고 싶은 상실의 아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벽에 이마를 박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집안은 어둑하고 차가워 보인다. 남자는 매우 공허해 보인다.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벌써 오래된 일이다. 원인불명 기억상실증이 전염병처럼 퍼진 사회, 사람들이 갑자기 기억을 잃고 있다. 좀 전까지 차에서 내렸던 한 남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타고 왔던 차의 존재도, 자기 존재도 잊어버려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다. 기억상실증은 국가 재난이 될 만큼 날로 심각해졌으며, 감기를 앓는 것처럼 비일비재한 일이 되어버렸다.

앞서 머리를 찧던 알리스(아리스 세르베탈리스)도 그 남자를 길에서 목격했다. 언젠가 그 병이 알리스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깜빡 잠에 들었다 깨어보니 자신이 누군지 집이 어딘지 잊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분증도 없어 신원미상으로 병원에 수용된다. 하지만 병원은 말 그대로 임시보호소다. 병원에서는 딱히 치료법도 기억을 되살릴 방법도 없다. 그저 가족이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방법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알리스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무연고자가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권유한다. 새 집에서 옷과 간단한 세간살이를 주고 새 정체성을 심을 기회를 준다. 녹음된 테이프를 듣고 과제를 실행한 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어 인증하면 된다. 기억을 잃기 전 무엇을 좋아하고, 잘했는지를 파악해 자아를 완성해 나가게끔 설계되었다.

과제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얗게 비어있는 기억 공간에 새로운 기억을 채워 넣으면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밖에 나가 자전거를 타보거나, 낯선 사람과 파티에서 춤을 추거나, 코스튬 파티에 참가해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인증샷은 앨범에 차곡차곡 기록되고 의사들은 가끔씩 앨범을 확인하러 온다.

알리스는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던 중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를 만나게 된다. 안나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혼자서 하기 힘든 과제를 도와 달라며 종종 알리스와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까워지는 듯 보였으나 금세 어긋나 버린다. 안나를 통해 프로그램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애플>은 상실의 아픔을 느릿한 전개를 통하여 공백을 스크린에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기괴한 공포영화를 연상하던 포스터는 도려내고 싶을 만큼 아픈 기억을 투영한 발버둥처럼 보여 마음 한편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인물 내면의 깊이감과 여운을 증폭하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4:3 화면비를 적용했으며,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도록 설정했다. 때문에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조차 흐릿하다. 인터넷이나 디지털 기계를 배제하고 아날로그 장비로 대신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카세트테이프, 폴라로이드 사진기, 손 편지 등은 기억을 불러내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알리스는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오렌지보다 사과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타 본 경험을 확인하고, 핫도그에 노란 소스를 더 넣어야 맛있는 취향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던 과제가 슬슬 재미있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소환되는 부작용이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들었던 음악, 같이 본 영화, 맛있게 먹었던 음식, 행복했던 모든 시간들이 떠오른다.

사실 알리스는 기억상실증이 아니다. 영화 초반, 병원에서 같은 방을 쓰는 환자와 대화를 나눈 후 그 환자의 증상을 마치 본인 경험처럼 읊는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다. 알리스는 얼마 전 아내의 죽음을 경험했고, 상실의 아픔에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생 배우기를 통해 새 기억을 심으면 고통이 사라질까 싶어 기억상실증인 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병원은 인간이 경험과 감정과 결합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됨을 간과한 채 프로젝트를 강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수도 있고, 왜곡되어 더 선명하게 떠오를 수 있는 기억을 똑같은 방식으로 채우기는 불가능하지만. 치료와 적응으로 사회 일원으로 품어주는 대신 유사 기억을 공유한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어 거리를 배회하게 만든 것이다.

<애플>의 감독 크리스토스 니코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 조감독 출신이다.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찬사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SF 적인 설정 없이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린 기발한 설정과 상상력은 오히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연출 방식이다.

데뷔작임에도 ‘책임프로듀서 케이트 블란쳇’이란 이색적인 타이틀을 달았다. 작년 제7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케이트 블란쳇과의 인연으로 거슬러 가게 된다. 심사하기도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 그리스 신인 감독의 <애플>을 챙겨 본 후 해외 배급, 홍보를 자처하게 된다. 내친김에 차기작 <핑거네일> 제작까지 참여, 주연 캐스팅으로 캐리 멀리건을 낙점해 성공적인 할리우드 데뷔까지 밀어주고 있다. 배우의 탁월한 안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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