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플러스에서 5월 4일 공개된 8부작 드라마 [드롭아웃]은 ABC 뉴스 팟캐스트 ‘드롭아웃’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2003년 피 한 방울로 240개 이상의 질병을 판별할 수 있다는 기발한 아이템으로 10억 달러 투자금을 받아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테라노스’ CEO ‘엘라자베스 홈즈’의 실화를 담았다.
‘유니콘 기업’이란 신화 속 등장하는 동물처럼 실리콘밸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타트업을 칭한다.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설립한지 10년 이하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2013년 ‘에일린 리’가 처음 사용해 대중화되었으며 제2의 닷컴 버블이란 지적과 함께 우려가 커지는 단어기도 하다.
3년 전 퓰리처상을 2회나 수상한 월스트리트저널 ‘존 캐리루’가 쓴 논픽션 《배드 블러드》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충격은 엄청났다. 분야 최고가 되고 싶고, 돈과 명예를 얻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전도유망했던 스탠퍼드 대학생이 돌연 중퇴하고 잔혹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낱낱이 분석한 자료다. 2015년 말 월스트리트가 제기한 의혹을 시작으로 끈질긴 추적 끝에 전 세계적 사기극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심장 쫄깃한 긴장감
그녀의 새빨간 거짓말이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 불황과 미국의 비싼 의료 시스템이 일조했다. 2002년 18살 이란 어린 나이에 베이징에서 만난 파키스탄인 ‘발와니 서니(나빈 앤드류스)’와 20살 넘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2003년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자수성가 신화를 쓴 엘리자베스 홈즈(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전 세계가 사랑하는 유명인이 되었다.
소형 바늘로 찔러 얻은 극소량의 혈액만으로 환자의 질병과 개인별 약품까지 맞춤으로 알려주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이었다. 누구나 좋아했고, 당당하며, 소녀들의 롤 모델로 성장하게 되었다. 잘 다니던 스탠퍼드 대학교를 중퇴 후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부모에게 등록금을 투자해 달란 설득으로 시작해 가족과 학교 인맥을 총동원해 초기 자금을 완성했다.
하지만 기술로 구현하기 위해 오래 걸렸고 시제품은 형편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은 장기화 프로젝트지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포부를 갖고, 뜻있는 과학자를 모아, 시제품 개발에 열 올렸지만 번번이 실패하고야 만다. 과학은 실패의 무덤에서 피어나는 단 한 송이 꽃과 같다.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투쟁한 사람만이 이뤄낼 수 있는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한 엘리자베스는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본인을 포함해 팀원들을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하게 만들어 실험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거듭된 실패 중 단 한 번의 성공을 맛보았고 이를 근거로 더 큰 투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FDA 승인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건너뛰고 드러그 스토어처럼 소매 점포에 입점해 버린다. 준비되지 않은 엉터리 기술로 소비자와 직접 만나겠다는 꼼수를 부렸다.
이사회에서 그녀를 내쫓으려 할 때도 서니의 투자금으로 기사회생했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씌우며 무서울 것 없이 회사 규모는 커졌다. 루퍼트 머독, 핸리 키신저, 조지 슐츠 같은 권위 있는 인사들의 찬사와 투자로 몸집을 키웠다.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 같았다. FDA와 증권거래소까지 신봉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 온갖 권모술수로 사로잡았다.
거짓된 성공 신화 조작된 인생
디즈니플러스 [드롭아웃] 스틸컷 (IMDb)
전 세계를 속인 사기극은 현재까지도 재판 중이며 스스로를 망한 스타트업 대표쯤으로만 생각하는 태도에 강한 불만을 가진 세력도 존재한다. 뻔뻔함인지, 이기심인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안하무인 행동은 한낱 가십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소시오패스, 감응성 정신병(망상 공유), 허언증, 리플리 증후군 등 다양한 정신적 문제로 입방아에 올라왔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황우석 스캔들과 닮았다.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고 모두가 그녀의 외피에 매료되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뛰어난 말솜씨로 종교 지도자급의 신임을 얻었다. 금발의 푸른눈, 백인 여성이 주는 판타지에 젊음이란 기름이 뿌려지자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여성 스티브 잡스를 꿈꾸던 그녀는 검은 터틀넥까지 오마주하며 적극적인 이미지메이킹을 펼쳤다.
드라마는 어릴 적부터 넘치는 승부욕과 포기할 줄 모르는 성공, 열망을 품은 인물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 엘리자베스 홈즈의 근황이나 결말은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손톱과 입술을 물어뜯길 반복하며 손에 땀을 쥐며 감상했다.
일단 싱크로율 높은 연기는 합격이다. 실존 인물과 말투와 의도적인 중저음, 스타일까지 완벽 빙의한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내면 연기가 성공적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에 자신감이 붙어 자신조차 속여버리는 자아 중첩, 심리적 갈등을 잘 표현했다.
과연 엘리자베스가 쫓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 억만장자 꿈 때문이었을까. 너무 일찍 신격화된 여성의 성공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더 나은 세상과 사람을 위한 기술을 개발했다는 허울뿐인 이상향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실리콘밸리 창업 성공주의, 여성 신화가 필요했던 사회 전체의 맹목적인 자세가 만든 합작품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봤다. 자수성가의 모델이 되었지만 빚 좋은 개살구였던 테라노스 사건은 스타트업의 이면을 제대로 꼬집은 실화였기에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