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새벽, 윗집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에 깼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푸르스름한 사위 그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욱 집중토록 한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오만가지 생각으로 시간을 채운다.
윗집은 이 새벽에 무엇을 하는 걸까. 윗집이 아니라 옆집일까? 희미한 락스 냄새가 화장실 환풍구를 타고 전해진다. 이제 상상력은 스릴러 한 편을 찍을 정도로 민감해져 간다. ‘쓱싹쓱싹’ 소리까지 들리자, 어쩌면 살인마의 은밀한 작업 소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친다.
<메모리아>는 앞선 생각을 확장하게 하는 호기심의 영화다. 새벽 ‘쿵’하는 소리에 깬 제시카(틸다 스윈튼)는 출처를 찾아 내내 고군분투한다. 처음엔 음향 전문가를 찾아 가장 근접한 소리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들릴지 모를 소리, 아니 진동에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일상생활에 지장 받는다. 대체 어디서 들리는 걸까. 뇌에서 울리는 진동, 마음에서 요동치는 발악일까. 머릿속에 시한폭탄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 이상한 소리 때문에 잠도 들 수 없어 괴롭기만 하다. 참다못한 제시카는 뒤늦게 의사를 찾지만 뻔한 진단만 듣는다. 콜롬비아 고지대의 압력과 스트레스로 뇌에 가해진 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보험처럼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귀갓길에 오른다. 잔잔한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매료되어 숲으로 들어갔다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에르난을 만나 기묘한 경험을 한다. 드디어 수수께끼를 풀어 줄 단서를 얻은 걸까? 어쩐지 이 남자의 기운 심상치 않아 보인다.
환영 같은 135분의 미학
<메모리아>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신작이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이끌린 여성을 따라 근원을 탐구한다. 감독은 폭발성머리증후군을 앓고 있어 ‘쿵’ 하는 소리에 시달렸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고, 우주 빅뱅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는 영감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이후 10년 동안 세계를 떠돌던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메모리아>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콜롬비아의 한 지역에서 터널 공사 중이었던 상황까지 연결하자, 그동안 머릿속을 헤집던 소리와 생각은 영화로 연결되었다.
뇌 주름처럼 굽이굽이 똬리를 틀고 있는 산맥은 감독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음파의 곡선과 오버랩되며 <메모리아>를 찍을 준비를 도왔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찍는 동안 쿵하는 소리는 멈췄으며, 마치 제의하듯 모든 것이 영적이었다고 밝혔다.
느린 호흡이 몽환적이다. 소리도 주인공인 것처럼 한 축을 담당한다. 태국을 떠나 처음으로 해외에서 만든 영화답게 다른 의미로 독특함을 풍긴다. 실험적인 스타일이라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마는 배우 틸다 스윈튼과 호흡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거장들과 작업한 노련함으로 응대했고,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영화는 지구의 심연에 있는 듯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이전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와 비선형적 서사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콜롬비아로 배경을 옮기고 자국 배우, 비전문 배우가 아닌 유명 배우와 협업했다는 점만 다르다. 내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물 흐르듯이, 꿈꾸는 듯이 받아들이면 편하다. 영화 자체가 인과관계를 따지도록 설계되지 않은 탓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을 영화로 옮긴 것처럼 낯설고 기이한 환영이 계속된다. 대신 압도하는 콜롬비아의 대자연을 즐긴다면 결말부 소리의 근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도움닫기다. 인류의 기억보다 앞선 태고를 간직한 시간의 아우성이 135분 안에 녹아들어 가 있다. 반드시 극장에서 관람해야 할 영화로 극강의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소리에 모양이 있다면 아마도 이 영화가 품은 매력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