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탑>은 홍상수 감독의 28번째 영화다. 작년 가을 논현동의 한 건물을 빌려 촬영한 흑백영화다.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관객과 만났다.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 중 하나인 권해효와 <소설가의 영화>를 작업한 이혜영, 조윤희, 박미소가 함께 했다. <도망친 여자>의 송선미와 <인트로덕션>의 신석호도 참여했다.
몇 년간 여성 주인공을 삼았던 감독은 다시 남성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잠시 멈추었던 자기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나씩 쌓아 4층 탑으로 만든 정수이자, 강남 한복판의 성 같은 건물에서 마법처럼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랜만에 딸과 재회한 영화감독
중년의 영화감독 병수(권해효)는 미술을 전공한 딸 정수(박미소)가 인테리어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4층 건물의 주인 해옥(이혜영)을 찾아간다. 사실 감독은 딸과 5년 만에 만나는 사이다. 아내와 10년째 별거 중이라 집에서 나온 지 오래다. 서먹함도 잠시, 지난 일은 잊고 딸의 미래를 위해 해옥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오랜만에 연락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흔쾌히 맞아 주는 해옥과 근황을 묻고 답하다가 한층 한층 건물 소개를 받는다.
아무리 건물 주인이지만 서슴없이 세입자 번호 키를 열고 들어가게 의아하다. 그녀는 1층부터 꼭대기까지 구경시켜주며 다 터놓고 지낸다며 괜찮다고 한다. 좀 과한 건 아닐까 싶지만, 안에 들어가면 강남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멋진 공간이 펼쳐진다. 해옥의 미적 감각이 반영되어 있어 건물도 멋져 보인다.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병수는 갑자기 제작사 대표의 전화 한 통에 자리를 비우게 된다. 그사이 정수와 해옥은 감독의 이야기로 긴 시간을 채운다. 둘은 무슨 말들을 주고받은 걸까.
홍상수 풍에 판타지 한 마법이..
영화 <탑> 후기
전작 <소설가의 영화>는 허영에 찬 소설가를 빗댄 경쾌한 풍자가 인상적이었다. 신작에서는 언뜻 동화 같은 묘한 감정이 든다. 제목처럼 탑에 갇힌 ‘라푼젤’이나 ‘푸른 수염의 새 신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물은 강남이라는 지명과 어울리지 않는 동떨어진 혹은 고립된 탑과도 같았다. 기이한 현상은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운 후 시작되는데. 이후 상상인지 실제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마치 폭풍우를 만나 고군분투를 겪다 집으로 돌아온 도로시 같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답게 <탑>은 솔직함이 매력이다. 조금씩 자신의 근황을 담았던 영화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지난 시간을 드러낸다. 뜬소문으로만 가득한 홍상수와 김민희의 사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둘의 근황과 가족들의 기분, 앞으로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말 저랬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재미를 안긴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기에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말하고 관객은 자유롭게 해석하면 된다. 그게 바로 홍상수 영화의 묘미다.
<탑> 속에 등장하는 정수와 해옥의 대사처럼 말이다. 딸은 영화감독인 아빠와 가정에서의 아빠가 다르다며 불만을 품고 있다. 한 마디로 “여우다”라고 말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정수의 말에 해옥은 반박한다. 여전히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한국에서 한 개인의 위치에 대해 고민토록 만드는 부분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는 이중성도 꼬집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실제인지 분간 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말맛이 살아 있는 대사는 한층 생기롭다. 또한 원래 건물 주인의 취향인지 영화를 위해 꾸민 것인지 알 수 없는 건물과 내부 인테리어도 감각적이다. 마치 연극의 막과 막 사이를 알려주는 듯한 멜랑꼴리한 음악이 들려오면 건물 안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간다. 오프닝부터 들렸던 음악이 또다시 들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은연중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