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사랑했던 영국의 황태자비 다이애나 스펜서의 이야기를 다룬 <스펜서>는 3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통해 한 여성의 삶에 닥친 고난과 역경 이를 극복하며 온전한 자신을 찾는 투쟁의 서사를 선보인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진행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과 은유를 통해 실존인물의 삶을 투영한다.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깊게 볼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다이애나는 영국 왕위계승 서열 1위 찰스왕세자와 결혼을 하면서 ‘현대판 신데렐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허나 그녀의 삶은 동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여성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찰스는 그저 왕위계승을 위해 다이애나를 택했고 그녀가 허수아비처럼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랐다. 찰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불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건 물론 왕실의 법도를 이유로 다이애나를 압박했다.
만찬을 위한 왕실의 저택은 과거 다이애나가 살던 집과 가깝게 위치해 있다.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 옷을 입혀줬던 허수아비에게 가 그 옷을 벗긴다. 허수아비가 있는 들판과 왕실의 저택은 대비를 이룬다.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지금은 왕실이란 공간에 묶인 건 물론 그 압박에서 견뎌야만 한다. 허수아비는 다이애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에 가깝다.
이 압박과 순종에 대한 강요는 진주목걸이로 표현이 된다. 이 목걸이는 찰스가 자신의 불륜상대에게 먼저 준 목걸이다. 다이애나는 이 치욕에 항의하지 못할 만큼 왕실 내에서 허수아비의 삶을 강요받는다. 다이애나가 찰스와 엘리자베스 2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흔들리는 이유는 이런 배경에 있다. 왕실의 강한 법도는 도입부 군인과 요리사들의 모습을 통해 표현이 된다.
군인과 요리사는 왕실과 연결된 직업이자 강한 규율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다. 도입부에서 이들이 교차로 주방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간접적으로 왕실 내부의 강한 규율과 이에 고통을 받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 암시는 저택에 들어간 다이애나가 몸무게를 재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재미로 시작된 왕실의 규칙이라는 몸무게 재기에 다이애나는 강한 반감을 표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다이애나의 과민반응 같지만 당시 다이애나는 자신을 배척하고 언론을 통해 창피함을 주는 왕실과 찰스의 불륜으로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신들은 항상 재미로 모든 이유를 만든다는 다이애나의 대사는 장난과 재미를 이유로 폭력을 감추려는 왕실의 행태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이애나가 변기에서 구토를 반복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왕실이 요구하는 법도와 순응을 소화해낼 수 없기에 매 만찬 때마다 변기를 향한다. 왕실이 정해준 드레스를 입고 변기에 고개를 파묻은 다이애나의 모습은 이 아이러니를 극대화시킨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캐릭터의 배치를 통해 다이애나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린다.
두 왕자 윌리엄과 해리, 재단사 매기는 다이애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다. 다이애나는 기존 왕실에서의 관습과 달리 직접 두 아이를 양육했다고 한다. 두 아이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여주며 아이들 역시 다이애나를 걱정하는 모습을 그린다. 매기는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로 극 후반부 다이애나에게 힘이 되어준다. 세상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존재가 더 많음을 일깨워주며 껍질을 깨고 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다.
고레고리 소령과 앤 불린은 다이애나를 압박하는 소재다.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레고리는 앤 불린에 대한 책을 다이애나의 침실에 가져다 두며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다이애나는 스펜서 가문과 앤 불린이 먼 친척 관계며 자신 역시 앤 불린처럼 왕실 내에서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면 죽을 것이란 압박에 시달린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였던 앤은 왕이 이혼에 실패하자 간통을 저질렀다는 모함을 받고 사형을 당한다.
저택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가고자 하는 다이애나의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펜서 가문의 옛 집과 앤 불린을 통해 완성이 된다. 폐가가 된 옛 집에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다이애나를 붙잡는 건 앤 불린의 환영이다. 이 순간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현재의 다이애나가 번갈아 등장하며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간 과거를 통해 현재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미래를 암시하는 연출을 선보인다.
이 장면에 대한 암시는 다이애나가 아이들과의 대화 중 시제를 말하는 대사에서 등장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언급하며 ‘스펜서’라는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다이애나가 구원을 받을 것이란 암시를 보여준다. 다이애나의 생애를 정해진 시간 안에 담기 위해 상징과 은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건 물론 복선을 통해 극적인 완성도를 더한다. 이 탄탄한 연출의 완성은 꿩이다.
찰스는 윌리엄에게 꿩 사냥을 지키려고 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길거리에 죽은 꿩의 모습을 보여준다. 꿩은 일부다처제를 하는 새다. 때문에 수꿩의 생김새는 화려하고 암꿩은 까투리라 불린다. 사냥을 당하는 건 까투리다. 찰스를 수꿩, 다이애나를 까투리로 볼 때 까투리는 왕실의 법도를 이유로 순종을 강요받는 여성을 향한 폭력을 상징한다. 다이애나는 윌리엄이 이런 폭력을 배우길 원하지 않는다.
작품은 수미상관의 구조로 극적인 안정감을 추구하며 동시에 비극성을 더한다. 다이애나가 혼자 차를 운전하는 장면의 반복은 그녀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다이애나가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비유하며 삶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한 여성의 투쟁과 비극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다이애나의 삶을 깊게 파고드는 이 영화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존재로 인해 완성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연기는 불안과 혼란의 인간화라 할 만큼 그 감정을 완벽하게 담아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해 검색을 해 볼 만큼 인물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는 열연을 선보인다.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의 한계를 연기로 채우면서 한 개인의 삶에 관객이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