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시추 작업에 몰두하던 인부 한 명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좀비처럼 비틀거리다가 피범벅으로 스러진다. 이후 카메라는 초원 위의 고급스러운 집을 훑으며 한 가족을 보여준다. 국회위원이자 남편 ‘그윈’은 사냥광이다. 벌써부터 토끼 두 마리를 잡았다고 몹시 흥분해 있다. 어두운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글렌다’는 이 집의 안주인으로 저녁 만찬 준비 전 차분히 명상 중이다.
큰 아들 ‘그웨이드’는 사이클 선수 출신임을 뽐내듯 몸과 운동에 집착한다. 의사를 포기하고 택한 사이클에 재능을 보여 올해는 철인 3종 경기를 나가겠다는 나르시시스트이자 성도착자다. 막내 ‘기토’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각종 약물과 친해지는 일이다.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사고 친 후에 끌려오다시피 외딴 집에서 근신해야 하는 처지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전혀 친해 보이지 않는 가족에게 오늘 하루는 매우 특별한 날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글렌다만 저녁 만찬에 올 손님 대접으로 분주하다. 초대 손님은 가족 4명을 포함해 총 7명. 단출한 인원이지만 글렌다 혼자서 종종거리느라 정신없다.
그때 젖은 머리를 한 카디가 도착한다. 글렌다는 도우미 카디를 반갑게 맞으며 식탁보와 테이블 세팅을 부탁한다. 하지만 카디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진흙으로 오염되어 버리고 바쁜 와중에도 이 집 남자 삼 인방은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카디를 훑기 바쁘다. 가족들의 날 선 시선은 계속 교차되고 긴장감이 영화 내내 흐른다.
사연 있어 보이는 카디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무표정이 되려 할 말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느릿한 동작과 신비로운 분위기는 차분하게 분위기를 잠식해 나간다.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유유자적 돌아다니다가 글렌다의 방에 들어가 다양한 물건으로 한껏 치장해보기도 한다.
밖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극심한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하며, 남편이 잡아 온 토끼를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해 주방을 나가 버린다. 이 마을의 추천 식당 종업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위도 약하고 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카디는 세 남성의 추파를 받으면서도 경멸의 시선을 계속해서 던진다. 대체 카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묘한 일들이 계속되기 시작하자 그녀를 향한 의심도 커지기만 한다.
드디어 만찬 시간. 오기로 했던 농장주 부부의 아내 ‘마이에르’만 도착했다. 남편은 오는 도중 사고로 발이 묶였다고 미안함을 표하며 어색한 만찬을 이어가지만, 원인 모를 음산한 기운에 압도되기 시작한다. 만찬 음식은 최고의 식재료로 정성스럽게 만들었지만 불편했고, 본격적인 초대의 목적을 털어놓자 마이에르는 급히 짐을 꾸려 떠나버렸다.
영화는 [닥터 후] 등 TV 시리즈를 연출한 웨일스 출신 ‘리 헤이븐 존스’의 장편 데뷔작이다. 낯선 웨일스어의 생경한 느낌까지 더해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포크 호러다. 최근 폐쇄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광기를 그린 포크 호러가 각광받고 있는데 대표적인 <미드소마>, <운디네>와 비슷한 결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웨일스 신화 마비노기 중 꽃의 정령 블로데이웨드(blodeuwedd)의 이야기에서 영감받았다며 신화, 민담, 전설과 자연환경을 결합해 느슨하고 태연한 공포를 자아냈다.
태곳적 주변 환경과 이질적인 현대적인 건축 스타일의 ‘저택’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 집은 물려받은 유산의 일부이자 감옥 혹은 벙커처럼 보인다. 사실 글렌다는 ‘유로스’를 통해 돈을 푸지게 벌었다. 농장이었던 땅이 개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듣고 주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새 투자자를 모객하는 중이었다. 평온했던 대지는 순식간에 굴삭기와 시추기가 들어와 마구잡이로 파헤쳐 난도질 해댔고, 무차별적인 개발과 탐욕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따라서 피로 물들어버린 저녁 만찬은 자연의 앙갚음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1장 손님한테 잘 보여야 해, 2장 조심하는 게 좋아, 3장 만찬을 준비해 놨어, 4장 깨어나면 안 돼, 5장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들렴, 6장 다 뺏어가면 뭐가 남아? 총 6챕터 구성을 짜 맞추면 경전의 한 구절처럼 의미심장해진다.
스릴러로 서스펜스를 유발하지만 자본과 개발, 소유욕으로 벌어진 환경의 복수까지 얽혀있어 잘 짜인 오페라 한편을 보는 듯한 구성이다. 오프닝에 쓰인 음악 비발디의 아리아 ‘니시 도미누스(Nisi Dominus)’까지 더해지면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아우르는 주제를 암시한다. 외딴 집에 초대 손님이 도착하기 전과 후의 미묘한 변화를 기반으로 삼아 과연 어떤 식으로 복수할지 기대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한편, <그녀는 만찬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으며 리 헤이븐 존스의 성공적인 장편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