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은 작가주의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짜릿함을 지니고 있다. 세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이 영화는 우연을 소재로 상상이란 살을 찌워 기막히고 발칙하며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에릭 로메르의 옴니버스 영화 <파리의 랑데부>에서 영감을 얻은 구성은 통일된 주제로 다른 색감의 에피소드를 선보인다.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발칙함에 초점을 둔다. 피팅모델 메이코는 함께 일하는 츠구미에게 한 남자와 함께했던 마법 같은 순간을 듣게 된다. 밤새 대화를 나눴지만 육체적인 사랑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츠구미의 낭만이 발칙함으로 바뀌게 되는 건 메이코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소악마와 같은 성격의 메이코는 츠구미의 낭만을 천진만난하게 무너뜨리려는 모습으로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는 상충된 욕망을 엉뚱하게 풀어내며 코믹함을 보여준다. 늦깎이 대학생 나오는 욕망에 충실한 성격으로 유부녀임에도 동기 사사키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다. 교수 세가와에 의해 유급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사키는 나오에게 그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저급한 욕망을 지닌 사사키와 나오의 행위는 항상 교수실 문을 열어두는 세가와의 엉뚱한 캐릭터에 의해 부드러운 웃음과 웃픈 결말로 재생산된다.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 번’은 코로나 시대를 위한 위로에 가깝다. 메일 바이러스로 인해 편지와 전보가 부활한 가상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40대 여성 나츠코는 센다이 역에서 우연히 동창 아야를 만난다. 아야의 집을 향한 두 사람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 뒤 상상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는 슬픈 과거를 밝은 미래로 바꾸며 코로나의 통제 속 만남이 멀어졌던 현대인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우연이라는 소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반복되는 흔한 일이지만 영화에서 표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영화의 이야기에는 개연성이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연이 극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세 편의 에피소드는 모두 우연을 통한 극적인 반전을 그린다. 우연으로 작용한 순간들이 이야기의 틀을 바꾸며 색이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는다.
상상은 이 우연에 살을 더한다. 주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창작하는 요소이자 각각의 극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상은 또 다른 가능성의 확장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아닌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인생 역시 상상의 영역이다. 단편적인 기억들은 순간에서 결말을 지니지만 후회란 감정은 다른 가능성을 꿈 또는 환상을 매개로 재생산한다. 영화는 이 상상을 이뤄주는 일종의 판타지적인 영감을 지닌다.
이 상상이란 요소가 가장 잘 발현된 에피소드는 ‘다시 한 번’이다. 제목 그대로 다시 한 번 왔으면 하는 기억 속 순간들을 두 여성은 역할극을 통해 풀어낸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상상을 상상의 영역에만 가둔 반면 ‘다시 한 번’에서는 현실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어찌보면 상상의 영역을 극적 구성에 따라 순차적으로 확장하는 시도이며 이를 코로나 시대의 위로와 연결하며 단편이지만 장편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이 옴니버스 영화의 시작은 에릭 로메르의 작품 편집을 20년 간 담당한 마리 스테판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구하기 쉬운 환경인데 왜 소수 인원으로 무언가를 찍지 않느냐는 마리 스테판의 말에 하마구치 류스케는 공감했다고 한다. 유명 배우의 연기력이나 영화적인 기교 대신에 시나리오의 힘에 기반을 두며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단편의 구성을 보여준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 시도는 단편영화가 나아가야 할 일종의 길을 제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필름다빈이 하나의 주제로 네 편의 단편영화를 묶어 극장상영을 시도한 <오늘, 우리> 시리즈가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대중성에서 거리가 있는 단편영화의 극장상영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스토리가 지닌 힘으로만 승부를 보는 <우연과 상상>의 시도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진가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