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일본을 넘어 아시아의 젊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시이 유야가 각본, 연출, 프로듀서까지 1인 3역을 맡아 활약했다. 실제 친구의 이야기에서 영감받아 3일 만에 각본을 완성하고 2주 만에 촬영한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2019년 상해 국제 영화제의 ‘Back To Basic: A Love Supreme’의 일환이었다. 지극한 사랑을 주제로 동아시아 6인의 감독이 모였고, 같은 예산과 주제로 다양한 국적과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시이 유야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범이 특별출연해 묵직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소통의 부재,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사랑 이야기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두가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한다. 살다 보면 어떤 의미에서건 초심을 잃어버리기 마련인데 그때 유발되는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선택과 변화 속에서 괴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혹은 홀가분하기도 할 것이다. 처음의 감정처럼 한결같이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되지 않는 것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고달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남편
5년 전 고교 동창 사이였던 아츠히사(나카노 타이가)와 나츠미(오오시마 유코)는 결혼해 딸 스즈와 가정을 꾸렸다. 아츠히사는 언젠가는 친구 타케다(와카봐 류야)와 회사를 차리고 싶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미래를 위해 퇴근 후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며 가족을 책임지려 안간힘을 쓰는 가장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조퇴 후 집에 온 아츠히사는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다.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흐지부지한 태도를 취한다. 과연 아츠히사는 충격을 받은 걸까, 체념하는 걸까. 평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편이 답답했던 아내는 5년 내내 아내이자 엄마로만 살아왔던 자신을 되찾고 싶다고 고백한다. 내가 나갈 수 없으니 남편이 떠나 줄 것을 요구하면서.
6개월 후, 갑자기 가정을 잃어버린 아츠히사는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내는 가족을 꾸리던 행복한 집에 다른 남자를 들이고 또 다른 행복을 꾸렸다. 하지만 모종의 일로 아내가 꾸린 가정마저도 산산이 조각나 버린다. 모두의 꿈은 한낮의 따갑고 강렬한 햇볕에 데인 것처럼 상처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 듯 보였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의 원제는 <살아버렸다>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녹록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기질을 가진 아츠히사는 계속해서 울분을 쌓인다. 아내와 딸이 떠나가도 좀처럼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며 괴로워한다. 속으로는 울고 있지만 겉으로 울지 못한다. 소통의 부재와 감정의 절제 사이에서 떠돌기만 할 뿐이다.
일본어로 말할 때는 진심을 전하기 어려워하다가도 외국어로 말하면 본심이 튀어나왔다. 언젠가 친구와 회사를 차리고 싶고 마당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은 꿈을 이룰 거라 다짐한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 모두가 떠나자, 비로소 아내와 딸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가 불러온 파장에 대해 되짚어보는 영화다. 가벼워 보이는 즉흥적인 답보다, 오랜 생각을 마치고 답하는 한 마디가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없어져 버리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면 이 방법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사소한 오해는 한마디라도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가족 사이에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게 절실하게 전달되는 영화다.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형제 아츠히사와 히데는 소통의 부재와 비극을 상징하는 캐릭터 자체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