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디덜러스’의 마지막 장 출간을 위해 9개국의 번역가가 프랑스의 대저택에 모였다. 하지만 모든 통신 장비를 반납한 채 종말론을 믿었던 러시아 대부호가 만들었다는 지하 밀실에 갇혀 버렸다. 결말 유출을 막기 위해 가축처럼 하루에 정해진 분량을 소화해야 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는 듯 무례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필요한 참고 자료는 제공된 책으로 충분하다며 인터넷도 철저히 금지한다. 개인의 자유 박탈은 심한 굴욕감을 주지만 여가와 레저 시설, 음식까지 완벽해 불만을 억누르려고 작심한 듯하다.
지루한 번역은 누군가에겐 기계적인 삶일지 모르나, 어떤 이에겐 삶의 해방감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참가한 아홉 명의 번역가는 각자의 성격과 문화에 따라 의견이 충돌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시작. 그러던 어느 날, 책 10페이지가 인터넷에 공개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 안에 범인은 바로 ‘너’
영화 <9명의 번역가>는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코드》의 세 번째 편인 《인페르노》출간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추리 소설 번역 과정에서 밀실 사건이 발생하고 의심이 난무하는 가운데 범인을 찾기 위해 추리해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펼쳐진다. 전형적인 후더닛 장르 같지만 중반부 범인이 밝혀지면서 범죄 스릴러 장르로 변주한다.
초반 범인을 노출해 김빠질 때쯤 상황을 비틀어 반전을 선사한다. 이후 사건은 ‘누가’에서 ‘왜’로 옮겨 간다. 편집장(램버트 윌슨)에게 메시지가 도착한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이번에는 10페이지가 아닌 100페이지를 유출하겠다는 협박이다. 비밀유지 각서에 서명한 9명의 번역가는 삼엄한 경비 속에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통신 장비 없이 벌어진 문서 유출 사건. 대체 누가 범인일지 궁금증이 커진다. 졸지에 이들은 번역가에서 용의자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편집장은 유출자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밀실 안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의심이 커져 쫄깃한 서사가 전개된다. 심지어 신비주의였던 작가의 실체를 아는 사람마저 편집장이 유일하다는 전제를 깔아두어 극강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편집장도 용의선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소리다.
이 영화의 호불호가 여기서 갈린다. 기껏 쌓아 올린 긴장감을 중반부터 유지하지 못해 구멍이 생겨버린다. <9명의 번역가>는 범인 찾기보다, 그 과정을 통한 개인의 복수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나이브스 아웃>의 추리극을 생각했다면 살짝 아쉽게 느껴질 수 있겠다. 원제가 ‘번역가들’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추리극의 마케팅을 펼친 게 탄로나 버린다.
영화는 ‘문학에 대한 경외’를 말하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살인》 범행 동기와 결말이 오버랩 되면서도 문학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 탐욕의 경고를 덧붙였다. 예술의 최전방에서 힘쓰고 있는 번역가의 고충도 그대로 전달된다. 작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진 삶을 한 번쯤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이라도 전달자가 없다면 그저 머물다 쇠퇴해 버리고 마는 유연함을 잘 포착했다.
몇 해 전 봉준호 감독이 말한 1인치의 장벽이 생각난다. 영화를 보면서 전 세계 모두가 공감한 자막의 힘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봤다. 창의적인 예술 활동으로 오롯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출판사나 작가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파리 목숨, 같은 언어로 번역해도 번역가의 자질로 인해 달라지는 말맛 등. 잘 몰랐던 번역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추리극인줄 알았는데 의외의 하이스트 장르로 빠지며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였다. 겉포장만 보고 샀는데 속이 전혀 다른 게 들어있을 때의 실망이나 놀라움은 이 영화를 정의하는 데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