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커밍 아스트리드>는 20세기를 통틀어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녹록지 않았던 작가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의 첫 장면. 노년의 작가가 수북이 쌓인 전 세계 아이들이 보낸 팬레터를 읽으며 시작된다. 편지의 사연들은 제각각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었을 한 글자, 삐뚤빼뚤한 앙증맞은 그림이 동봉된 소중한 편지다.
삐삐를 통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얻었다는 아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오히려 살고 싶어진다는 고백, 그런 힘의 원천이 마법은 아니냐는 질문, 아이를 이해하는 어른이자 노는 게 좋은 어른에 대해 궁금함이 가득한 천진난만한 내용이다.
아스트리드의 책을 읽었거나 삐삐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작가 자체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는 위대한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힘들고 어려웠던 역경을 쫓는다. 100여 년의 시공간적 거리를 공감을 따스한 시선으로 채워간다.
반짝반짝 영특했던 시골 소녀
독실한 시골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집안일 돕기, 동생 돌보기 등 허드렛일뿐인 지루한 하루.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아스트리드(알바 어거스트)는 우연히 지역 신문사의 인턴으로 들어가며 삶의 전환을 맞는다. 영특한 머리로 신문사 일을 빠르게 배워갈 무렵 아내와 별거 중이던 편집장 블롬버그(헨릭 라바엘센)와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하게 된다.
당시 종교. 사회적인 인습 때문에 노심초사해야 했던 쪽은 여성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부터 갖는 것은 집안의 수치였다. 어쩔 수 없이 혼외 임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나 홀로 스톡홀름으로 향해야 했다. 모든 희생과 고통은 아스트리드의 몫이 되었지만 아스트리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아스트리드는 침착하게 홀로서기를 준비해 나간다. 비서 수업을 받으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미혼모 출산을 돕는 덴마크에서 혼자 출산한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위탁모에게 맡기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생물학적 아버지인 블롬버그는 아스트리드와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아스트리드는 미혼모로 낙인찍혀야만 했다.
사회적 역할을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삶
지금의 스웨덴과는 사뭇 다른 상황은 보수적인 성(性) 문화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아스트리드의 고난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엄마와 아이의 유대감이 절실한 시기를 놓치면서까지 재판 결과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스트리드는 늘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그 상처와 상실을 더욱 강한 모성애와 자존감을 연료 삼아 성장해 간다.
출산 후 몸과 마음이 배로 힘들었지만 아이는 결코 짐이 아닌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책임하고 보수적인 사회의 폭력에 당당히 맞서며,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헤져나가겠다는 용기와 위로를 스스로 터득해 간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누구였던가. 100여 년 전 말괄량이 삐삐의 창시자이자 아동 문학가, 사회활동가, 웅변가로도 활약한 스웨덴의 전설적인 작가가 아니었던가. 아스트리드는 어릴 적부터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독립적이었던 아이였다. 여자라서 안된다는 수많은 제약에 의문을 품으며 오빠와 차별하는 부모님을 향해 당돌한 돌직구를 날렸던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말 한 마리를 거뜬히 들 수 있는 힘, 고집 세 보이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싶은 심성, 혼자서도 살림살이도 척척 해내는 만능 재주꾼의 ‘삐삐’는 어쩌면 가장 힘들었던 작가의 경험이 점철된 페르소나였다.
<비커밍 아스트리드>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실화를 바탕으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를 담백하게 담은 전기 영화다. 6년여 동안의 관찰을 통해 작가의 작품 속 배경과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초석을 함께 지켜보는 경험이다. 1920년대 세계 최고의 인권국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양성평등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시절을 톺아 볼 수 있다. 여성에게 긴 머리를 종용하고 결혼을 통해서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원했었다. 그래서 더욱 시대를 정면 돌파하는 모습은 쾌감을 넘어 숭고하게 느껴질 정도다. 항상 씩씩해 보이는 삶에는 화창한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중충하고 흐린 날도 수시로 교차했다는 것을 긴 시간을 할애하여 톺아본다.
영화는 작고 외로운 존재들에게 건네는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여성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인생이란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계획에도 없는 일이 불쑥 생기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말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그만두려고 할 때 잘 해낼 거라는 용기를 심어준다.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