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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용서와 복수의 굴레에 관하여

<쓰리 빌보드>에는 성별, 인종, 직업에 관계없이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시선이 들어있다. 주인공 밀드레드의 딸 헤이즈가 성범죄로 인해 사망하기 때문에 초반 밀드레드는 ‘나라면 전 세계 모든 남자들의 피를 뽑아 DNA을 대조했을 것이다’라는 대사를 한다. 그녀가 세개의 광고판을 통해 비난한 경찰서장 또한 남성이다. 어떻게 보면 밀드레드는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 여성을 대표하고, 그녀와 맞서는 경찰, 범죄자, 광고판을 빌미로 해코지하는 동네 치과 의사 등의 남성들이 그녀와 대립구도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데, 초반의 이런 구도는 극이 진행될 수록 차차 누그러진다. 그들이 여성과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대화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딸이 죽던 날 “걸어오다가 강간이나 당해라!” 라고 소리쳤던 엄마도,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경찰서장도, 바깥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분노조절장애 경찰관, 동물원에서 일하는 미성년자 여자친구를 만나는 아빠, 피해의식을 갖고있는 난쟁이 등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처음엔 타인의 아픔과 외침에 귀를 기울여줄 여건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씩 결함이 있는 인물들을 보며 완벽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실수 한 번 하지 않은, 나쁜 마음 한 번 먹어보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뜻이다. <쓰리 빌보드>는 이런 인간의 불완전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로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결함을 발견하고 치유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 둘 씩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에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는데, 암으로 죽어가던, 광고판에 쓰여진 이름의 주인공, 월러비 서장의 죽음이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에 나들이를 다녀온 후 검은 봉지를 머리에 쓴 채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봉지를 벗기지 말고 경찰에 전화해’ 라는 메모가 적힌 봉지를 쓴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월러비라는 인물은 밀드레드와 초반에 대립구도를 이뤘던 경찰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범인을 찾아 그녀를 돕고 싶어한다. 애초에 광고판이 그의 이름을 저격한 것은 그가 에빙 경찰서의 서장이라 모든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인데, 광고판에 걸린 자신의 이름을 보고도 밀드레드를 위협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병을 앓다 마침내 자살을 택하면서 남은 사람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월러비는 아내, 밀드레드, 딕슨에게 편지를 남긴다. 어쩌면 ‘월러비’라는 인물은 <쓰리 빌보드>에서 유일하게 정서적 결함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광고판의 임대료를 내주고, 자기가 죽는 이유는 결코 광고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밀드레드는 그가 남긴 편지를 읽고 진심으로 슬퍼한다. 죄책감도 물론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이미 월러비 서장이 범인을 누구보다 잡고 싶어하며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전체의 테마를 아우르는 문장이 등장한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엉뚱하게도 이 말은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는 않는 전남편의 열 아홉 살짜리 애인의 입에서 나온다. 이 문장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상황에 와 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결함과 비례하는 ‘화’를 각각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적어도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까지는. 강간범에게 딸을 잃은 밀드레드의 분노는 광고판으로 표출되고, 마을 주민과 경찰들이 어디에선가 쌓아 누적된 분노는 광고판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분출된다. 딸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밀드레드의 전남편의 죄책감은 광고판에 불을 지르는 행위로 이어지고, 월러비 서장의 죽음은 딕슨에게 분노로 다가와 웰비를 폭행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들은 아직도 분노를 해소하지 못한 밀드레드로 하여금 경찰서에 불을 지르도록 한다. 이런 분노는 정확히 내가 분노한 바로 그 특정 대상에게 분출되는 것이 아니다. 화를 어디서 얻었든 간에, 걸리는 사람에게 마구 쏟아 붓는 식이다.

딕슨과 밀드레드가 연대하여 범죄자가 사는 곳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딕슨이 잡은 범인은, 헤이즈를 죽인 바로 그 범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류의 범죄를 다른 주에서 저질렀고, 아직 처벌받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피해자의 유족인 밀드레드에게는 범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동기가 충분하고, 진범이 아닐지라도 사회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인 범인이 눈앞에 있으므로 밀드레드가 그 범죄자를 죽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결말에서 진범을 잡거나, 범죄자를 찾아가 복수를 하거나. 애매하게 그들은 범죄자를 죽일지 말지, ‘가면서 결정하자’며 심판을 유보한다.

사실 이건 정의에 관한 딜레마이다. 범죄자를, 피해자의 유족이 죽인다고 해서 범죄가 아닌 걸까? 이러한 보복 범죄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대표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가 있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의 주제는, 진범을 잡아 응징하는 것도, 보복 범죄도 아닌 ‘인간성’과 ‘소외’, 그리고 ‘용서’이다. 정의에 관한 생각을 열어 두고, 광고판 세 개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마친다.

글: 키노라이츠 손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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