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st Viewed

Categories

<소피의 세계> 일상을 기록하는 행위에 대해

누구에게나 힘들었을 때가 있다. 이를 극복하면 훗날 추억으로 남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추억이란 단어는 어떨 때는 잔인기만 하다. 그 상황이 진행 중이라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씁쓸한 기억이 될 테니까.

<소피의 세계>는 앞선 이유를 들어 필자에게 추억을 들춰 보게 하는 영화다. 사소한 일도 사진이나 글로 저장해 두면 훗날 세월의 더께를 더해 특별해진다고 믿는다. 메모, 일기,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에 남겨두는 편을 즐긴다. 요즘은 SNS에서 ‘ 몇 년 전 과거’라는 알림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그때마다 지난 과거의 기억을 다시 봤을 때 생경한 감정이 흐른다. “내가 이때 이랬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했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묘하고 복잡한 마음이 교차한다. 알 수 없었던, 혹은 잊었던 감정이 글과 사진으로 일깨워지는 포인트가 이 영화를 보고도 떠올랐다.

우울했거나 때론 행복했던 그 시절은 북촌의 아름다운 가을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광경을 만들어 낸다. 실제 이제한 감독의 집과 자주 가던 단골 가게에서 촬영된 영화답게 자연스러운 소품과 연기, 일상이 소소한 마법을 부린다. 홍상수 영화 <도망친 여자>의 배경이 된 북촌뿐만 아닌, 비슷한 스타일은 아마 오랜 시간 그의 스태프로 참여한 경력 때문일 것이다.

2년 전 내 과거, 남의 블로그에서 본다면?

수영(김새벽)은 인왕산이 창밖으로 보이는 북촌의 어느 집에서 남편 종구(곽민규)와 살고 있다. 그러던 중 2년 전 고마운 사람을 찾아 한국에 왔던 여행자 소피(아나 루지에로)의 블로그에 자신의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소피가 작성한 블로그의 글들은 대부분 한없이 따뜻하고 사려 깊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고 사소한 행복이 밀려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그땐 죽고 싶을 만큼 최악이었지만 타인이 기록한 글을 보니 많은 것이 달리 보였다. 당시 소피는 4일간 부부의 집에 머물며 부부와 많은 일을 겪었었다. 특히 급하게 집을 빼서 나가야 해 이사 날만 받아 놓고 지지리 궁상떨던 때였다. 그 이유로 수영은 짜증이 많이 났었고 종구는 내내 미안해했다. 자주 싸웠고, 펑펑 울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화해했던 때였다.

그때 소피는 외출했다가 핸드폰을 찾으로 집에 잠시 들렀었고 우연히 부부의 대화를 엿듣는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전해지는 슬픔 때문인지 소피는 부부를 이해하게 된다. 누구나 힘들 때가 있지 않냐는 생각에 구태여 알은척하지 않고 배려해 준다.

부부는 소피의 아침을 챙겨주고, 북촌 지도를 챙겨주며 이것저것 친절히 가르쳐 주며 소피가 찾는 헌책방에 관심을 보인다. 사실 소피는 북촌의 어느 책방에서 일한다는 주호(김우겸)를 찾기 위해 한국 왔지만 소득 없이 며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친구 조(문혜인)도 만나며 북촌 여기저기를 탐방하게 된다.

그때 우연히 만난 관광 해설사나 다짜고짜 집에 찾아온 집주인과 조카 부부 등. 짧게나마 알차게 한국 사람을 만나며 나흘 동안 에피소드를 쌓았다. 그때의 감상을 블로그에 끄적거려 놓은 것을 2년 만에 읽게 된 것이다.

아날로그적인 배경, 장소, 소품들

영화에서 ‘집’은 인물과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이자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왕산 뷰가 창문으로 보이는 집은 홍상수의 <도망친 여자>의 공간이다.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집주인 수영(송선미)과 같은 이름이라 두 작품을 본 관객이라면 재미난 순간이 펼쳐질 것이다. 그 밖에도 김새벽을 비롯해, 서영화, 신석호 등 홍상수 사단이 대거 투입되어 반가움도 배가 된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관계는 <클레어의 카메라>와 흡사하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듬어 낸 이제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는 2년 전 소피의 내레이션과 2년 후 수영의 내레이션이 교차되는 구조다. 극중 시점과 지금이 묘하게 겹치기도 한다. 아직까지 마스크를 벗지 못한 현재와 오버랩된다. 특히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부터 손 편지 엽서, 중고 책, 신문, 털모자, 장갑 등 아날로그적인 장면이 온기를 불어 넣는다. 결국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주고받았다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2년 전 ‘나’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나를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나 같은 것들 말이다.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일들, 그때는 왜 이리도 씩씩거리며 씹어먹을 듯이 화내고 자신과 상대방을 학대한 걸까 반성했다. 머리로는 알지만 늘 마음만 앞선 감정이 먼저인 인간은 말 한마디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잔인한 존재임을 되새겼다.

또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엮일지 몰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에 공감했다. 에어비앤비로 며칠 머물렀던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살뜰히 챙겨주던 부부와 힘들어 보이는 부부를 보며 행복을 채워간 묘한 인연을 바라보는 심정은 오랜만에 포근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여러 에피소드 중, 마치 내 이야기를 그대로 쓴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피와 수영, 종구가 인왕산 정상에 올라 작은 점처럼 보이는 집을 찾아 환호하는 모습을 볼 때 생각했다.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이 이제는 작은 티끌이 되어버렸구나, 삶에 일어난 일은 한낱 먼지처럼 잊히고 새로운 일과 만남으로 하루하루를 또 쌓아가고 있구나..”



    Leave Your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