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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사주> 세상에서 가장 예뻤던 황후의 최후

배우 ‘비키 크립스’를 좋아한다. 매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출연작을 한두 편은 보는 것 같다. 몇 년 동안 개근 출석이다. 어쩌면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는 건지. 항상 경이롭게 감탄하는 중이다. 올해는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로 분했다. 뮤지컬에서 환영하는 가족이다. 황후’ 엘리자베트’와 황태자 ‘루돌프’의 슬프고도 미스터리한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입에 영원히 오르내리게 되었다.

처음 만난 작품은 <팬텀 스레드>였다. 대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 옆에서 굽히지 않는 기세로 대등하게 연기하더라. 그 모습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대체 누구길래 호기심이 생겼고, 이후 필모그래피 깨기를 했었다. 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해맑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가 푸석한 중년의 얼굴도 곧잘 어울린다. 하얀 도화지 위에 어떤 얼굴도 만들어갈 수 있는 변화무쌍함을 가진 배우라 생각한다.

그래서, 분명 실존 인물마저도 교과서나 회화에서 보이는 평면적 얼굴이 아닐 거라 짐작했다. 다이내믹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했으리라 기대했다. 예상은 당연히 적중했다. 비키가 새롭게 쓴 엘리자베트는 가장 아름다웠던 황후란 수식어에 플러스알파를 더했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엘리자베트

<코르사주>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셀럽이었던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비키 크립스)를 다룬다. 제목답게 몸매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코르사주에 갇힌 황후가 이를 벗어던지고 한 여성이자 인간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언니 맞선 자리에 따라갔다가 눈에 들어 15세에 황제와 결혼해 황후가 되었다. 자유롭게 컸던 어린 시절은 끝이었다. 준비 없이 황후가 되어 어렵게 익히느라 고생했다.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미모의 기세가 퍼졌지만, 사실은 만들어진 허상 같은 존재였다. 대중잡지의 표지모델로 활약하거나 가십 소재로 항상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황후를 연기하는 황후라고 해도 될까.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외면을 극도로 치장하는데 집착했다. 항상 외모와 몸매를 가꾸기 위해 식단 조절, 미용, 운동으로 스케줄을 꽉 채웠다. 육식을 기피했고 유동식으로 먹었으며, 승마, 체조, 펜싱, 아령을 즐겼다. 현대로 치자면 집안에 피트니스와 피부미용실이 있는 거나 다름없었고, 운동기구를 만들어 꾸준히 신체를 단련하기도 했다.

타고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유리관 속의 화초처럼 오스트리아의 가장 예쁜 황후가 되어야만 했다. 대중은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패션, 기품 있는 행동에 열광했고 수요를 만족하기 위해 거짓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키 170cm, 몸무게 50kg, 허리둘레 40cm를 평생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마흔을 전후로 완벽한 몸매, 풍성한 머리칼로 이미지화된 것에 지쳐갔다. 인형같이 앉아서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하고 웃어주기만 되는 생활에 무료함은 더해갔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황후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 초상화가 그려지는 것도 거부했고, 드넓은 황실이 답답하고 좁게만 느껴져 밖으로 떠돌았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 변해가는 신체 앞에서 무력해진 황후는 서서히 일탈을 꿈꿔갔다.

결국, 숨 막힐 듯한 통제 속에서 자유를 꿈꾸던 엘리자베트는 마침내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게 무엇이듯 상관없다는 듯이. 허망하게.

40세 여성을 바라본 초상

감독 마리 크로이처는 중년 이후 공식 석상에 얼굴 드러내는 일이 극히 적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무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엘리자베트는 죽을 때까지 다이어트와 싸웠고, 오늘보다 내일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았다.

개미허리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갑옷 같은 코르사주를 조였다. 치장에만 4시간, 코르사주를 입는 데만 1시간, 풍성한 머리카락을 위해 3시간을 손질했다. 아무리 진취적인 사상을 갖고 일을 잘하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워야만 관심받는 국가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았기에 정신병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후원했다. 치장하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아니했다. 영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그리스어까지 언어 공부에 매진했고 글을 썼다. 기술혁신에 관심이 많아 사진과 활동사진을 남겼다. 특유의 기품과 우아, 지식을 갖춘 여성이었다.

그래서 <코르사주>는 영리하다. 흔히 전기 영화는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있다. 기획은 주인공 비키 크립스의 제안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에 맞게 엘리자베트 다시 들여다보자는 일환으로 진행된 결과였다. 액자 속에 갇혀 있던 황후를 꺼내 입체적으로 주조한 끝에 재미마저 보장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영화, 전시, 도서와 연계해 보길..

영화를 본 후 합스부르크 역사를 깊게 파도 흥미로울 것이다. 올해는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주년이며, 엘리자베트는 1837년 12월 24일에 태어났다. 생일을 앞두고 개봉해 의미있다.《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려진 나카노 교코의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도 추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과 연계해서 관람해도 좋겠다.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을 쥐고 흔들었던 650 년사를 한눈에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흔히 대한민국에서 마흔이란 나이는 성별 값이 다르게 계산된다. 나이 듦은 남녀 공통된 노화현상이지만 유독 여성의 나이는 수치화된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에서 배우 조여정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 캐스팅 거절당한 일화를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연예인인 탓에 과장되긴 했지만 한 해 두 해 나이 먹는 즐거움은 유독 여성에게 더 엄격하다.

얼마 전, 만 나이가 폐지된다는 소식에 한국인은 갑자기 혼란스러웠을 거 같다. 2살 어려지는 건 환영이나, 학교, 회사, 군대에서는 다소 난감했을거다. 그러나 여성을 나이로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잔존할 것으로 보인다. 동안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은 현대에도 유효하고 끊어내기 쉽지 않을 거다. 황후 엘리자베트가 마흔이 되자 사회활동을 끊은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만 같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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