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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녀] 50년 전 윤여정의 매력적인 얼굴

김기영 감독이 연출하고 윤여정 배우의 영화 데뷔작인 <화녀>가 재개봉했다. TV 드라마에서 얼굴을 비추던 윤여정 배우가 본격적인 영화배우로 발돋움한 작품이다. 윤여정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자신을 있게 한 김기영 감독을 향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

김기영 감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이 영감을 받았다고 전하는 감독이다.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복식과 미장센, 표현력, 스토리텔링, 촬영기법 등 시대를 앞선 천재란 수식어가 부족한 작가주의 감독이다. 변태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과감함이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그는 영화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주제로 했는데 윤여정 배우와는 <화녀>, <충녀>, <죽어도 좋은 경험>을 함께 하며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우뚝 섰다. <하녀>, <화녀>, <충녀>는 앞선 1960년 작 <하녀>와 함께 ‘여(女) 시리즈’로 불린다. 이색적이게도 본인이 본인 영화를 리메이크, 각색하기도 했다. 84년도에는 72년도 <충녀>를 각색한 <육식동물>을 선보였다.

감독이 만든 <하녀>의 주요 설정은 경제력 없는 남편과 대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실질적 가장 아내가 부부인 가정집에 하녀가 들어오면서 파국을 맞는 치정극의 형태를 띤다. 60년에는 <하녀>, 71년 <화녀>, 82년 <화녀 82>를 10년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악녀>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김기영 감독의 사망으로 무산 되었다. 2010년에는 임상수 감독이 <하녀>를 현대 버전으로 리메이크했는데 그 영화에서도 윤여정은 나이 든 하녀 병식을 연기했다.

영화 <화녀> 스틸컷

찬장을 열고 살아있는 쥐를 잡거나 도심 속 자리한 양계장, 계단으로 이어진 2층 집,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으로 꾸며진 그로테스크한 실내장식, 화려하고 기괴한 미장센과 장르적인 촬영이 인상적이다.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에서는 다양한 의미가 교차하는 충격적인 몽타주, <엑소시스트>가 연상되는 파괴적인 계단 장면 등. 20대의 앳된 얼굴과 이를 악 무는 귀여운 표정이 매력적이다. 특히 50년 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현대적인 윤여정의 외모, 패션, 말투를 만나볼 수 있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아내(전계현)를 의지해 작곡가 동식(남궁원)은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 예술을 한답시고 공식적인 한량으로 전락했다. 매일 집으로 몰려드는 여가수들은 동식에게 곡을 받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때마다 아내는 몹시 불안하다. 하지만 무능한 동식도 자랑거리가 있다. 바로 바람피운 적 없는 게 가장 큰 자랑인 모범 남편이라는 타이틀이다. 누가 유혹해와도 넘어가지 않는 아내 바라기라며 자신을 치켜세운다.

한편, 시골에서 상경한 명자(윤여정)는 과거를 숨긴 채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마침 직업소개소를 찾은 아내는 명자를 하녀로 들이게 된다. 명자는 이 집의 하녀가 되는 조건으로 돈 대신 결혼 시켜달라 할 만큼 결혼을 원하는 소녀였다. 사실 명자는 겁탈당할 뻔한 상황에서 정당방위로 살인을 하고 서울로 도망 왔던 것이었다. 결혼이라도 잘해서 팔자 고쳐 보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몸이 경직되는 등 어리고 보잘것 없는 여성이 겪은 상황은 말도 못하게 잔인했다.

명자는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하며 양계장 소일거리와 집안일을 배운다. 실수는 잦았지만, 아직 어리기에 부부는 명자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안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동식은 술에 취해 명자를 겁탈하고 이내 임신까지 하자 집안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명자는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동식을 ‘여보’라고 부르며 첩으로 들여줄 것을 강요한다. 동식은 술 먹고 기억도 나지 않는 실수라며 단칼에 거절하지만, 계속되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한 지붕 두 아내를 거느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명자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다. 순진한 소녀에서 화려한 옷차림에 짙은 화장, 서슴없는 행동과 말투로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악녀가 되어간다.

영화 <화녀> 스틸컷

하지만 이내 명자는 유산하게 되고 골방에 감금된다. 며칠 동안 갇혀 있던 명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방을 나와 보니 참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하며 혼비백산한다. 내 아니는 유산하게 만들고 버젓이 이 집 자식은 요람에 누워 있었던 것. 눈이 뒤집힌 명자는 “이 집 남자는 아이를 배도록 하고 이 집 여자는 아이를 떼게 한다”라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드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를 시작한다. 명자는 복수심에 불타 물불 가리지 않고 주인인 행세를 한다. 급기야 동식마저 공식적으로 빼앗아 남편으로 만들고, 또다시 임신하려고 하지만 동식은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70년대 한국 사회를 고스란히 담은 한 가정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과 욕망을 보여준다. 동식은 집안의 기둥은 남자라며 철저한 가부장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만 경제적인 활동은 아내에게 미루는 사람이다. 가수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유혹해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정절을 이유로 떵떵거린다. 후반부 명자의 네 번째 살인죄를 뒤집어쓰고도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여 봤다며 자기방어에 한창이다. 이런 남편을 떠받들며 묵묵히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하녀를 고용해 어깨의 짐을 덜어보고자 했지만 들이지 말아야 할 화근이었다. 그야말로 ‘화녀(火女)’ 때문에 한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광기어린 집착의 파국은 그야말로 신선하다 못해 상상을 초월한다. 불륜 치정극으로 시작해 막장, 살인 등 온갖 악행이 자행된다.

명자는 순수한 백치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욕망이 거세 당하자 거침없이 직진한다. 마치 더욱 빨갛고 아름답게 독기를 품는 독버섯처럼 그늘에서 시작해 완전히 세상을 장악한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가 될 색다른 팜므파탈이 탄생하며 압도적인 여성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부르주아 계급을 무너트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협, 욕망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성,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파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화녀>의 원본은 유실돼 국제영화제 출품용으로 프랑스어 자막이 포함된 영상이 유일하다. 디지털 복원작업을 하였지만 화면이 고르지 못하다. 그 점이 오히려 영화를 빛나게 하는 장점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인다. 이 영화로 윤여정은 제4회 시체스국제영화에제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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