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계의 거대한 기류 중 하나는 여성감독이 여성의 욕망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다. 여성의 역할이 전형적이고 수동적이며 욕망을 보이는 행위 자체가 터부이자 파격이었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담론을 보여준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등한시되기 쉬운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억압을 다루는가 하면(<스왈로우>), 금기시 되었던 노년 또는 중년 여성의 성적욕망 역시 보여준다.(<빛나는 순간>)
여성감독은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감독에 비해 더 섬세하게 여성의 욕망을 그려낼 수 있다. 여성 캐릭터를 앞세워 표현하는 이 욕망은 기존 남성중심의 영화 문법에서 벗어나 여성영화의 문법을 새롭게 만드는 추세다. 때문에 여성 중심 서사의 경우 그 욕망을 다루는 문법이 서서히 적립되고 있다. 일련의 특징을 보이며 해석의 묘미와 함께 여성영화가 지닌 장르적 특징을 조립한다.
무민의 창작자로 알려진 토베 얀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토베 얀손>은 영화가 여성의 욕망을 조명하는 방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그녀가 지닌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며 어떤 좌절과 고통을 겪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해 여성영화가 보여주는 여성 욕망의 표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대 또는 남성의 억압
토베 얀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핀란드는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를 재건하는 예술에 공을 들인다.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토베는 자연스럽게 화가의 길을 택하나 빛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조각가인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 국가예술지원금 발표 자리에서 토베 얀손은 떨어지나 그녀의 아버지는 지원금을 받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성 예술가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그리고 예술을 하는데 돈이 필요한 것도 어느 시기에나 마찬가지였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세계로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꾸준히 창작활동을 이어가 사후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동생 테오의 자금적인 지원이 컸다. 토베는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해 후원을 받지 못한다. 그림은 예술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토베의 유일한 사랑이자 동업자이기도 한 비비카는 예술을 위해 결혼을 택하라고 토베한테 조언한다. 그녀 역시나 시장인 아버지와 자금력이 있는 남편을 통해 연극 연출가로 발을 들이게 된다. 이는 당시의 시대가 여성 혼자 자립적으로 예술에 도전할 수 없으며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대 또는 남성에 의한 억압을 의미한다. 그 형태가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토베 얀손>은 간접적인 형태로 이를 표현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다. 반면 창작물이나 특정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의 경우 직접적인 형태로 이를 보여준다. 와인스타인 성추문 사건을 소재로 한 <밤쉘>의 경우 권력층 남성에 의해 성착취를 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조명한다. 여성들은 을의 위치와 폐쇄적인 직장구조로 인해 억압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인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돌로레스 클레이븐>은 가부장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 문화는 남성이 가정을 책임지는 대신 신체적 정신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돌로레스는 남편에게 학대를 당한다. 딸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만들고자 몰래 은행에 돈을 모으지만 남편에 의해 모두 빼앗긴다. 은행이 돌로레스의 허락 없이 남편이란 이유로 계좌를 보여주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는 전후 핀란드라는 <토베 얀손>의 시대적 배경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으로 소위 말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세대를 구축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영화로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들 수 있다. IMF 이전 기업문화를 조명한 이 작품은 회사에 속해 있으나 그 존재이유는 잔심부름과 커피 타기였던 상고 출신 여직원들을 주인공으로 다룬다. 시대 또는 남성에 의한 여성 욕망의 억압을 통해 좌절과 고난을 보여준다.
심리적인 낙화 또는 절망
남성서사에서 주인공은 고난과 역경에 직면했을 때 이를 이겨내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그 결말이 패배로 끝난다 할지라도 체제 또는 운명을 거스르고자 하는 용기(또는 객기)를 통해 극적인 재미를 준다. 여성서사의 독특한 점은 마치 공포영화나 정신붕괴물을 보는 듯한 심리적인 낙화 또는 절망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영화 속 토베는 신문사와 ‘무민’의 정기연재 계약을 체결하며 결국 미술로 성공하지 못했기에 만화를 택했다고 답한다.
실제 인물인 토베 얀손의 선택과 그 심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작품 속 캐릭터는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재능을 택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은 앞서 비비카 앞에서 화가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했던 토베를 떠올렸을 때 그 심리적인 낙화를 보여준다. 무민이란 세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으나 정작 본인이 가고자 했던 길에서는 중도하차하며 역경과 극복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이런 토베의 심리적인 모습은 실존 인물인 주디 갈랜드를 소재로 한 영화 <주디>와 심리적인 측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했던 아역배우 출신의 가수이자 배우인 주디 갈랜드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당했다. 당시 할리우드는 아역배우의 인권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촬영을 위해 수면제와 각성제를 계속 복용하게 만들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주디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신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작품은 미국에서 더는 인기를 끌지 못해 영국으로 공연을 떠난 주디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디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도 다시 성공하고자 하는 분투도 선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 위에 힘겹게 매달려 있을 뿐이다. 이런 심리는 <버티고>에서도 보인다. 작품의 주인공인 서영은 계약직, 상사와의 불안한 관계, 밤마다 시달리는 엄마의 전화 등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정신적인 낙화를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서영이 보이는 심리는 현실극복의지가 아닌 버티는 삶이다. 이는 비교적 현대에 성립된 여성서사의 문법이 현대적인 삶의 형태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의식을 지니고 있다. 허나 삶을 놓아버릴 수는 없기에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버티고자 한다. 여성서사의 연대 역시 극적인 승리를 그리는 작품도 있지만 위로와 위안의 측면에서 끝나는 작품이 존재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토베 얀손은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나 연달아 심리적인 절망을 느낀다. 후원을 받지 못하기에 캐릭터 일러스트 일을 하며 꿈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결국 좌절을 겪고 비비카에 의해 동화작가의 길을 택하게 된다. 토베 얀손의 자유로운 삶과 열정을 조명하지만 이것이 현실을 극복하는 강인한 의지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마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줘도 한계를 느끼고 버티는 현대인의 모습처럼 말이다.
동성애
여성영화에서 위기나 고난을 극복하는 서사의 핵심은 같은 여성의 연대다. 앞서 언급했던 <밤쉘>, <돌로레스 클레이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모두 여성의 연대가 위기극복의 열쇠가 된다.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말처럼 사랑과 우정은 미묘한 감정의 차이다. 연대란 우정이 사랑이란 감정이 되면서 동성애의 정서로 빠지는 경향을 여성영화는 보인다. 토베는 비비카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비비카는 지배욕과 소유욕, 성적인 욕망이 강한 여성으로 연극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거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토베와 사랑에 빠진 뒤 그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며 함께 파리에 가고자 한다. 허나 토베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자 다른 여자를 데려오며 질투심을 유발한다. 함께 ‘무민’ 연극을 준비하면서도 토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보인다.
그럼에도 토베가 비비카에 대한 애정을 마치 순정처럼 품는 이유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에서 비롯된다. 토베와 비비카는 둘 다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여기에 토베가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처럼 비비카는 연극계에서 아버지 힘으로 밀고 들어온 불청객 취급을 받는다.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연결되며 같은 여성끼리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창구를 공유한다. 비비카의 캐릭터성은 자연스럽게 우정이 아닌 동성애로 관계를 이끈다.
이런 동질감을 바탕으로 한 동성애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볼 수 있다. 중산층인 화가 마리안느는 귀족 계층의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를 만나며 같은 여자로서 그녀가 느끼는 고통과 억압에 공감한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와 감정을 공유하며 연대를 이루고 이 강렬한 감정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텔 잇 투 더 비즈>의 경우 진이 처음부터 동성애 성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지나 리디아와의 사랑은 동질감에서 비롯된다.
동성애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떠나야 했던 진과 망나니 남편에 의해 싱글맘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 리디아는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 이해하고 지켜줄 사람이 서로밖에 없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이는 남성을 통해 구원 또는 위로를 얻을 수 없기에 그 사랑의 대상을 여성으로 설정하며 더 강한 연대와 유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