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영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흡사 첩보 영화처럼, 팀과 신호를 주고받은 주인공은 민첩하게 바닥에 엎드려가며 우체국을 털러 들어간다. 하지만 파스텔톤 건물의 배경에 각각 어딘가 엉성하게 자리 잡은 인물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듯 담아내는 카메라의 태도는 심각한 범죄 상황을 보여준다기엔 상당히 썰렁하다. 온종일 각종 공짜 이벤트를 찾아다니며, 때로는 우체국을 털기도 하는 가족 사기단의 이야기. 오프닝부터 심상치 않은 톤 앤 매너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눈에 보아도 ‘아싸’의 차림새를 한 이들은, 말만 가족이지 비즈니스로 맺어진 관계나 다름없다. 도둑질이나 사기, 공짜로 돈 버는 일에서 주된 업무를 하는 것은 딸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 그녀의 아버지인 로버트(리처드 젠킨스)와 어머니 테레사(데브라 윙거)의 3인 가족은 모든 건수의 몫을 정확히 3등분 한다. 밀린 집세를 내기 위한 목돈이 필요하게 되자, 올드 돌리오는 공항에서 짐을 일부러 분실해 여행자 보험으로 돈을 타내는 계획을 세우고, 가족은 비행기에서 멜라니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카조니어>는 설정부터 평범하지 않은 영화다. 이 3인 가족은 비누거품 공장의 옆집에 세 들어 살고 있으며, 매일 특정 시간대에 벽을 타고 흐르는 비누거품을 양동이로 걷어낸다. 또한,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 살면서도 지진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특이한 속성을 가진 인물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야기이기에, 영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들은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일상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영화에서 관객은 무엇을 따라가야 할까? 바로 ‘감정’이다. <카조니어>에서 감정의 주체는 ‘올드 돌리오’라는 주인공 한 명에게 시작부터 줄곧 고정되어 있다.
비일상적인 사건들과 달리 올드 돌리오가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들은 감독의 확실한 연출을 통해 또렷하게 전달된다. 부모에게 동업자가 아니라 화목한 가족의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카메라 역시 올드 돌리오의 시선을 통해 부모님을 타자화시켜 바라보며, 상황에 따라 올드 돌리오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한다. 이런 올드 돌리오의 감정을, 관객 외에 알아채주는 사람이 바로 비행기에서 만난 낯선 여자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이다. 매일매일 부모님을 따라 벌이는 사기 행각에 염증을 느껴가던 올드 돌리오의 눈앞에 새롭게 나타난 자극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카조니어> 스틸 컷
멜라니라는 인물이 사기꾼 가족에게 일으킨 것은 꽤나 심각한 지진이라고 볼 수 있다. 딸에게는 한 번도 친근하게 대해준 적 없던 로버트와 테레사는 멜라니를 친딸보다 더 살갑게 대하고, 올드 돌리오는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겉으로 표출할 줄은 모르지만 멜라니의 행동과 가족의 변화로 인해 조금씩 동요한다. 올드 돌리오도 종종 이 답답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돌파를 시도해왔다. 스스로의 문제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그녀는, 느닷없이 마주치는 상황극 속에서 감정을 ‘연기’함으로써 조금씩 느껴본다. 대리출석을 위해 들은 육아 수업에서 스스로의 어린 시절이 되어 연기를 한다든가, 멜라니가 방문하던 노인 ‘에이브’의 집에서 실제 가족들처럼 생활하는 연기를 하는 장면들이다. 연기는 물론 거짓으로 꾸며내는 행위이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진짜라는 것을 역시 카메라는 포착해낸다. 관객은 연기 위에 연기가 더해지는 것을 보며 극중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가족에게 우호적이었던 멜라니도 점점 올드 돌리오의 태도에 공감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일탈을 결심한다. 실은 앞서 단계적으로 쌓아온 로맨스를 전제로, 사랑의 도피를 펼친 셈이다. 올드 돌리오에게 부모가 해주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해주려는 멜라니. 하지만 올드 돌리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26년 동안 거래 혹은 돈을 위한 계획 말고 다른 의도를 가진 채 움직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뭐든지 빨리, 효율적으로 해치울 생각뿐인 그녀에게 멜라니는 팬케이크를 작게 구워 겹쳐 쌓는 것과 같은 소소한 행복을 알려주기도 한다.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던 중, 어두운 공중 화장실에 두 사람이 들어간 사이에 지진이 발생하고, 올드 돌리오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 어둠이 가득하던 스크린은 올드 돌리오가 상상하는 대로, 별이 가득한 광경을 담아낸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가 여태 어떤 인물을 따라왔는가에 관한 확답이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올드 돌리오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카조니어> 스틸 컷
여기서부터는 그녀의 두 번째 삶이다.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올드 돌리오가 26년간 살아오며 굳힌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텁텁하고 괴롭기만 한 인생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세상의 종말인 줄로만 알았던 지진이 끝나고,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자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이 캐릭터가 표출하고 싶어 하던, 억눌려있던 감정들을 마음껏 쏟아내도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올드 돌리오가 마트 계산대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신의 몫을 환불받는 상황은 사실 이전까지도 수없이 벌어졌을 상황이다. 수입의 3분의 1을 정확히 나눠 받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멜라니라는 새로운 자극과, 그간의 경험이 축적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주어졌다. 계산대 앞에서 지난 삶을 환불받고, 마침내 새로 출발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하는 이 괴짜 같은 영화는 어쩌면 인생에 대한 은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올드 돌리오가 부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어 내 인생을 구해주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전개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마치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듯 따라가는 재미가 있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 속에 느껴지는 ‘진짜’ 감정들이 큰 울림을 남기는 작품이다.
글: 키노라이츠 손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