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전 세계적인 거장으로 이름을 높인 셀린 시아마 감독은 뒤늦게 국내에서 전작인 ‘성장 3부작’ <워터 릴리스>, <톰보이>, <걸후드>가 정식개봉하면서 신작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 <쁘띠 마망>은 여성의 성장과 정체성을 다뤄온 세계관을 답습하면서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색깔을 선보인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온 8살 소녀 넬리는 과거 엄마가 숲속에 지었다는 오두막을 찾고자 한다. 아이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이 행동은 예기치 못한 만남을 가져온다. 그곳에서 넬리는 엄마와 이름이 같은 동갑내기 마리옹을 만난다. 마리옹은 넬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두 소녀는 빠르게 서로를 향한 우정을 키워나간다. 이 우정을 치유로 만든 건 작품이 지닌 전체적인 색감이다.
이 작품의 색채는 동화다. 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들의 우정을 소재로 한다. 감독 스스로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지브리가 지닌 서정성이 잘 나타난다. 특히 숲속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초기 대표작인 <이웃집 토토로>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이웃집 토토로>의 느낌은 한 장면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마리옹의 캐릭터는 이런 느낌을 더욱 심화시킨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워터 릴리스>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고, <톰보이>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고통을 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동화는 로맨틱 코미디처럼 밝기만 하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고 때론 잔혹하게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섬뜩한 설정을 보이기도 한다.
넬리의 어머니는 다소 우울한 존재로 등장한다. 오히려 작품에서 밝은 측면을 보여주며 넬리와 어린 마리옹과 교감을 나누는 건 아버지다. 넬리는 어린 시절 마리옹을 만나며 그 심리적인 아픔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작품 초반부터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보여줬던 원인이기도 하다. <이웃집 토토로> 역시 밝은 분위기와 달리 우울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남매와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온 이유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 때문인 점이다.
이런 색감은 넬리도 어머니인 마리옹도 모두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치유를 만들어내는 건 놀랍게도 어린 두 소녀다. 두 소녀가 펼치는 역할극은 이런 치유의 일환으로 보인다. 정신의학적인 치유방법 중 하나이기도 한 역할극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함으로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넬리와 마리옹은 역할극을 통해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우울을 바라본다.
딸이 엄마의, 엄마가 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마법 같은 순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셀린 시아마가 전하는 위로라 할 수 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다. 때문에 넬리와 마리옹이 겪는 아픔은 심한 상처나 상실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살면서 하나쯤 품고 있는 아픔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치유하는 방식을 가족으로 풀어내며 동화의 색채에 가슴 따뜻한 포근함을 더한다. 같은 여성이 연대와 위로의 대상이 된다는 점, 두 소녀가 만남을 통해 성장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기존 셀린 시아마 감독의 세계관에서 연장되는 측면을 지닌다. 본인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기존 작품과는 다른 동화의 느낌을 더하는데 성공한다.
마법 같은 결말을 통해 깊은 여운을 남기며 감성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셀린 시아마의 또 다른 성장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의 틀을 뚫고 나오기 보다는 그 범위를 넓히면서 연출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 우울과 아픔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가장 환상적인 위로라 할 수 있다. 10월 7일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