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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은희의 눈에는 왜 슬픔이 가득했을까

2019년 <기생충>과 함께 한국영화계를 흔든 또다른 작품이 있다. 다양성 영화로는 흥행 대박에 가까운 14만 관객을 동원했고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25개의 상을 휩쓴 <벌새>는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으며 최고의 한국영화로 등극했다.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은희라는 소녀를 통해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지니며 94년 당시의 대한민국의 모습에 현대적인 가치를 투영시킨다.

 절친한 친구와의 다툼, 연인의 배신, 오빠의 폭력, 가부장적인 아빠의 외도, 자신에게 무관심한 엄마 등 영화에서 은희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들이지만 그 시절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은희가 서예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과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특수성에 가깝다. 영지는 오빠의 폭력에 괴로워 하는 은희에게 “절대 가만히 맞고 있지 말라”고 말한다. 여성의 연대와 저항은 현대적인 가치에 가깝다. 학생운동을 했던 영지는 그런 투쟁의 역사를 여성에게 덧씌우는 인물이다.

 성수대교는 단절을 의미한다. 작품 속 은희는 수많은 단절을 경험한다. 친구와 싸워 혼자 학원에 가는가 하면 남자친구의 배신을 경험한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따라다니던 후배가 ‘그건 지난 학기였잖아요’라며 무시하기도 한다. 여기에 영지 선생과의 이별도 겪는다. 은희에게 이런 단절은 슬픔과 동시에 성장을 의미한다. 은희는 수많은 감정 속에 아픈 만큼 성숙한 성장을 경험한다.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헌데 작품 속 은희의 눈은 시작부터 너무나 슬퍼 보인다. 그 슬픔은 영화의 진행에 따라 점점 깊어지는 느낌을 지니지 않는다.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은희는 슬픔을 안고 태어난 것만 같다. 이 감성은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지니는 연속성의 이유라 할 수 있다. 관객은 인물을 처음보지만 그 인물은 가족 내에서 그런 역사를 겪어왔다. 그런 보편성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작품이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이다.
  
 김보라 감독의 이 2011년 작 단편영화는 9살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은희는 리코더 시험을 잘 봐서 칭찬을 받고 싶다. 새 리코더를 사고 싶고 집에서 하루 종일 연습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은희의 소원을 허락하지 않는다. <벌새>에서 은희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배우 이정기는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로 출연한다. 가족이 도울 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떡집과 달리 단편에서 떡집의 모습은 휑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장사를 준비해야 되기에 바쁘다. 또 새 리코더를 사주기에 금전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지 않다.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을 그대로 쓰길 원한다. 일 때문에 부모는 바쁘고 은희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집에서 리코더를 연주하는 은희는 공부를 해야 되니까 조용히 하라는 오빠의 말을 무시한다. 은희에게는 중요한 리코더 시험이 있기 때문이다. <벌새>에서 그랬듯 오빠는 은희를 때리고 은희는 벽장 안에 숨어 울음을 터뜨린다.

<리코더 시험> 캡처본

벽장 안에서 슬픔을 털어놓는다는 건 가정이란 공간 그 어디에서도 마음대로 슬픔을 표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은희의 울음에도 아버지는 오빠를 혼내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오빠는 남성이고 공부를 해서 성공해야 되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자식도 떡 장사를 하는 걸 원하지 않는 아버지는 폭력을 눈감아준다. 은희는 그렇게 무관심과 묵인 사이에서 성장하였음을 이 단편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너무나 짧게 끝나는 리코더 시험의 모습은 허무하다.
  
 이 허무함은 은희의 세대를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가정 내에서의 폭력과 무관심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부모는 먹고 살기 위해 바빴고 덕분에 자식들이 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가해자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분출구가 필요했다 변명할 수 있다. 서럽게 울던 은희는 그 울음의 대가로 오빠가 혼나거나 사과를 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런 순간은 다가오지 않는다.

<리코더 시험> 캡처본

<벌새>의 은희는 귀에 문제가 있어 병원을 찾고 수술을 받게 된다. 귀의 문제는 오랜 시간 은희가 받아온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 가족들은 은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은희의 귀에는 나쁘고 모진 말들이 꽂힌다. 오빠의 폭언과 아버지가 언니를 혼내는 소리, 현실에 지친 어머니의 한숨소리와 아버지의 잔소리가 귀를 아프게 만든다. 눌리고 찢겨 문드러진 귀는 수술을 받아야 될 처지에 이른다.
  
<리코더 연주>와 <벌새>는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성을 보여준다. 단편에서 표현한 감정과 상황은 장편에서 더욱 성숙해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고통의 축적을 놓치지 않는다. 단편이 개인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면 장편은 그 연속성에 주목하며 두 편이 합쳐져 완벽하게 삶이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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