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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니센스] 잊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사는 남자

잊고 싶은데 못 잊는 기억이 있는가. 기억은 과거로 남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제목 ‘래미니센스(reniniscence)’는 오래된 과거일수록 더욱 또렷이 기억하는 망각의 역현상을 말한다. 누구나 행복했던 기억, 유년 시절의 아름다웠던 한때, 빛나는 찬란함을 간직한 레미니센스를 통해 기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은은한 감정의 반향을 경험하는 로맨스에 누아르 형식을 곁들인 SF 물이다.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미래를 보지 못한다. 과거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등장인물 누구도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엄청난 마약 바카를 통해 암울한 현실을 도피하거나, 술에 절어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이마저도 어렵다면 과거로 돌아가 안주해 버린다. 과거는 시간의 목걸이를 이루는 구술로 묘사된다. 하나하나 꿰어 완성된 목걸이는 언제든지 꺼내 걸어볼 수 있는 물질로 환원되었다. 메모리칩에 저장된 기억은 성형하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배가 되어 삶을 유영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바닷물이 넘쳐 육지가 침수된 마이애미에 사는 남자 닉(휴 잭맨)은 전쟁 이후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기계를 통해 돈을 벌고 있다. 마이애미와 뉴올리언스는 낮에는 뜨거운 열기와 바닷물로 생활이 어려워 잠자리에 들고 열기가 식고 바닷물로 어느 정도 빠져나간 밤이 되어서야 활동할 수 있는 도시다. 이로 인한 갈등은 점철되기 시작한다. 부자들은 침수되지 않은 마른 땅에 살고 빈민은 저지대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댐을 걱정하며 근근이 살아가야만 한다.

과거 참전 용사였던 닉은 전쟁 때 신문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고독한 남자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봤지만 자신의 기억은 보여주지 않는다. 단 전우였던 와츠(탠디 뉴튼)만이 어렴풋이 과거를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메이(레베카 퍼거슨)가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싶다며 기억 재생을 요청하고 그녀의 기억에 매료된 닉은 메이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기억을 공유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돌연 사라져 버린 메이를 찾기 위해 닉은 고군분투한다.

이후 사라진 연인을 향한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기계에 누워 시간을 보내던 중 메이가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음을 파악하고 난항을 겪는다. 과연 그녀는 누구인 걸까. 암살자인가, 위선자인가, 사랑스러운 연인인가. 메이의 행방을 뒤쫓던 닉은 실체에 다가갈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영화 <레미니센스> 스틸컷

영화는 HBO 드라마 [웨스트 월드]의 공동각본가이자 제작자로 활동하는 리자 조이의 연출 데뷔작이다. 임신 기간 중 <레미니센스>의 시나리오 작업을 한 감독은 60년 동안 품고 있던 할아버지의 기억과 첫아이에 대한 기억을 결합하여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녹여 냈다. [웨스트 월드]의 암울한 세계관과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연출, 드라마의 연장선 같은 배우의 얼굴이 낯익은 영화다.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시간, 기억, 삶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대사가 많은 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결과적으로 [웨스트 월드]시리즈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호감도가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리사 조이는 천재 각본가 소리를 들으며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은 조나단 놀란과 부부 사이기도 하다. 부부는 조나단 놀란의 형 크리스토퍼 놀란과 제작자 엠마 토머스와 더불어 패밀리 영화제작단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비극 로맨스의 주인공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끌어들여 묘미를 더한다. 노래와 리라 연주가 최고인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의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연주로 저승 신을 감동시켜 지상으로 아내를 데리고 나온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내를 데리고 올 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사랑하는 아내를 보고야 만다. 끝내 아내를 저승에서 구하지 못한 슬픔에 잠겨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오랜 신화 속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는 차용과 동시에 살짝 비틀어 오랜 여운을 선사한다. 추억이란 마약에 중독된 한 남자의 현실이 고통인지 축복인지는 영화를 본 관객의 몫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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