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일과 가정, 임신과 출산, 육아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큰 부담이다. 한번 뒤처지면 멀찌감치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도 쉽지 않다. 육아휴직이 있지만 이마저도 쉽게 쓸 수 없어 눈치 볼 분,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고 경력은 단절되어 버린다.
<앵커>는 이런 두려움과 모성이 상충할 때 벌어지는 서스펜스를 담아 색다른 긴장감을 발산하고 있다. 그 패기는 나아가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모녀의 관계를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내 참신한 인상을 준다. 고전 영화 스타일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신경질적이며 연약하지만 당찬 외모와 달리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시달리는 심리와 광기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나 <레베카>가 완벽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광기에 사로잡히는 <블랙 스완>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정 양립과 경력단절이란 이중고 사이에서 고민하는 점이 한국 애니메이션 <클라이밍>과도 접점을 이루고 있다.
살인예고 전화를 받고 무너지는 앵커
9시 뉴스 메인 앵커로 활약 중인 세라(천우희)는 생방송 5분 전,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살해될 거라는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해 끊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았던 세라. 이번 기회에 진짜 앵커가 되어 보라는 엄마(이혜영)의 권유에 직접 현장을 찾아간다.
회사는 개편 바람이 불고 있었고, 기자 출신 앵커가 필요하다는 부담은 커지고 있었다. 기자의 역량도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에 용기를 내 찾아갔던 게 화근이었다. 집안은 난장판이 된 지 오래, 그곳에는 제보자인 미소와 딸의 시체가 발견되고 세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모녀 죽음 사건을 단독 보도하며 인정받은 세라는 추가 취재차 현장에 들렀다가 이상한 남자와 마주한다. 자신을 미소의 정신과 주치의라 말하는 인호(신하균)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세라는 그가 감추려고 했던 진실을 알고 싶어 병원에 자기 발로 찾아간다. 어떨결에 최면술을 받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사건과 마주하며 심한 정신적 착란을 겪게 된다.
모녀 사이.. 뒤틀린 심리를 풀어 낸 참신함
영화 <앵커>는 최고에 오른 앵커가 모종의 사건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몰랐을 상처를 마주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본인 죽음을 제보하는 의문스러운 전화 후 진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연이어 세라에게 벌어지는 환각, 환청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성공에 목마른 앵커와 안락한 가정을 이루고픈 압박은 심리적 혼란과 공포 분위기를 드리우기 충분하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어둡다. 20대에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다 인생이 무너져버린 모녀 사건은 트리거가 되어 세라(딸)와 소정(엄마) 사이의 감정을 끌어내는데 일조한다. 엄마는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과 “너만 없었으면..”이란 대사를 읊조린다.
전자는 사실 짜증 나지만 엄마 곁을 떠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포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과 가정이 양립하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여성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후자인 “너만 없었으면..”은 모녀 사이를 경쟁상대로 여긴 독특한 설정이다.
엄마는 이루지 못한 꿈을 딸에게 전가하고, 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맞추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모성과 여성이란 점이 한국 영화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소재다.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증오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지만 출산과 육아로 반복되는 이중적 감정이 지옥임을 몸소 전해준다.
더이 상 올라갈 곳 없는 1등. 왕관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라의 불안한 심리는 기이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누군가가 나를 짓밟고 끌어내리려 한다는 불안감, 이를 부추기는 엄마의 잔소리, 제보 전화 후 죽은 모녀의 사건까지 연결된다.
좋은 소재지만 단점도 보여..
하지만 독특한 소재를 갖고도 아쉬운 부분이 드러난다. 앵커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지친 감정 변화가 다소 부정적으로 다뤄져 불편한건 사실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호러를 표방하다 세라가 최면 치료를 받으면서 극명하게 바뀐다. 중후반부 꼬아 놓은 실을 제대로 풀지 못해 뭉텅이로 잘라내 버리거나 놔둬 버리는데 이를 세 배우가 연기력으로 간신히 메우고 있다. 천우희는 원톱 주인공으로 영화를 이끌고 이혜영과 신하균이 뒷심 부족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
단편 <감기>, <소년병> 등을 선보여 각종 영화제를 휩쓴 정지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개인과 사회적 욕망, 모두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 하는 여성의 힘든 점에 대해 잘 포착했다. 여성이라고 해서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모성 신화를 비틀어 새로운 시각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