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한국문화계는 지금과 같은 한류열풍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였다. 당시 드라마에 <겨울연가>, <풀하우스>, 가요계에 동방신기와 보아, 비가 한류스타로 인기를 견인했다면 영화계에는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가 있었다. 이 <살인의 추억>의 감독 봉준호는 이후 20년의 세월 동안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왔다. <마더>, <괴물>, <설국열차> 등 전 세계에 K-시네마를 인식시키는 영화들을 만들어 온 그는 한국영화사 100년이었던 2019년, 정점에 오른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영화계의 거장 자리에 올라섰다. 한국영화 성공의 역사를 썼다고 평가할 수 있는 봉준호에게 전 세계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본인을 비롯해 갑자기 한국에서 세계적인 패러다임을 이끌 수 있는 뛰어난 창작자가 다수 등장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때마다 봉준호의 입에서는 한 단어가 나온다고 한다. 바로 ‘노란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90년대 영화를 사랑했던 청년 봉준호와 그 시간을 함께했던 영화 동아리 ‘노란문’ 회원들이 30년 만에 다시 그때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확행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누구나 학부시절 경험했던 동아리의 무용담에 가깝지만 그 안에는 한국영화 전성기의 태동이 담겨 있다.
90년대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종식으로 이념논쟁이 희미해지던 때이다. 국내에서도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치열했던 학생운동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열정을 풀 곳이 없었던 청춘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영화였다. 당시 우후죽순 생겨난 다수의 영화 동아리는 현재 한국영화계의 자양분이 되었다. 노란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들의 시작은 영화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OTT와 VOD가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던 때에는 관람할 수 있는 영화의 수가 한정적이었다. 당시 노란문의 리더였던 최종태 감독은 영화학도였지만 영상으로 작품을 보는 게 아닌 글로만 배웠다고 한다.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페데리코 펠리니와 같은 거장들의 영화를 직접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뭉쳐 만든 동아리가 노란문이다. 이곳의 회원이었던 봉준호 감독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처럼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시중에서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비디오를 다수 구해온 열정과 꼼꼼한 관리로 렌트 후 분실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디테일한 연출로 소문난 봉준호 감독의 ‘봉테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당시 이들이 만든 잡지에 영화 <대부>를 컷 별로 분석한 봉준호의 그림은 이런 열정과 디테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당시 거장들의 영화를 평가한 자신의 글에 허세임을 인정하며 소소한 웃음과 함께 이제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이의 여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묘미는 봉준호 감독의 알려지지 않은 데뷔작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93년 제작한 단편영화 <백색인> 이전에 만들어졌던 이 작품은 오직 노란문 회원들만 관람한 특별한 작품이다.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당시 노란문 회원들을 비롯해 청춘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담고 있다. 극중 주인공인 고릴라는 파라다이스를 찾아 여정을 떠나지만 원하지 않게 적을 만나고 지하를 향하게 된다.
노란문 회원의 말을 빌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무엇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는 알았던 그 시절의 목소리를 담은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이들이 여전히 봉준호의 데뷔작을 기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지하실은 봉준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소로 한 회원은 이 단편에 그의 작품세계가 지닌 모든 에센스가 들어가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 봉준호 팬들에게는 높은 만족도를 자아낼 것이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노란문의 회원이었던 이혁래 감독의 작품이다. 때문에 회원들이 모여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며, 이들의 추억을 부풀리거나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저 따뜻하게 그 시절을 추억하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90년대 한국영화 성장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졌는지, 그 토양 속에서 거장 봉준호가 어떻게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는지 알 수 있게 만든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세기말 시네필들이 모여서 쓴 이 다이어리는 이제 막 영화에 빠져든 이들에게는 도전의 의욕을, 오랜 시간 영화를 사랑해 온 이들에게는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애틋함을 자아낼 것이다. 젊은 시절에만 부릴 수 있는 허세와 패기가 열정이 되고, 이 열정이 성과와 명성, 그리고 함께 회상할 수 있는 따뜻한 기록이 되어가는 과정에 빠질 수 있는 시네필을 위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